②영화 <자유의 언덕>

 

   
 
흩어진 편지, 흩어진 시간. 영화는 여자 주인공인 권(서영화 분)이 자신에게 도착한 편지 뭉치를 떨어뜨리면서 시작된다.
여러 장의 편지는 바닥에 흐트러지고, 날짜가 없는 편지는 쓰인 순서를 모르게 돼버렸다. 편지는 사랑하는 권을 찾아 한국에 온 모리(카세 료 분)가 쓴 것이다. 모리는 권이 없는 동안 한국에서 지낸 자신의 며칠을 일기 형식으로 편지에 담았다. 권은 자주 가던 카페인‘ 자유의 언덕’에 앉아 뒤죽박죽된 편지를 읽는다.
  서사는 간결하다. 모리는 권을 찾아 한국으로 오지만 찾지 못하고, 권 대신 감정표현에 솔직한 영선(문소리 분)에게 호감을 느낀다. 모리는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날 묵고 있던 게스트하우스에서 다시 권을 만나고, 둘은 함께 일본으로 가 아들딸을 낳고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 이렇듯 단순한 이야기가 복잡하면서도 관객의 흥미를 끄는 까닭은 영화가 시간 순서가 아닌 권이 읽는 편지의 순서대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원인과 결과는 항상 시간에 종속되어 나타나지만‘ 자유의 언덕’ 속 인물들의 감정은 그렇지 않다. 그들의 감정은 순서를 알 수 없지만 크게 흩어져 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해체된 시간 속에서 이어지는 장면들은 어지럽고 섞이는 듯 하지만 질서 있다. 홍상수 감독은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시간과 서사의 해체는 그 모든 것과 함께 감정의 흐름까지 재구성하기 위한 장치”라고 밝혔다.
  모리는 내내 <시간>이라는 제목의 책을 읽는다. 그는 영선에게 책 내용을 설명하면서 “시간은 실존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의 뇌가 과거, 현재, 미래란 시간의 틀을 만들어 내는 거에요. 하지만 우리가 꼭 그런 틀을 통해 삶을 경험할 필요는 없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 그의 말처럼, 관객도 시간적 순서가 어떤지 맞춰볼 필요가 없다. 그저 스크린 너머에서 다가오는 이야기와 감정을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감독 역시 시간적 틀을 뭉개고 시간의 영향력을 최대한 배제하기 위해 순서를 뒤틀었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때문에 관객은 각 장면의 시간적 위치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 속에서 끊임없이 시간을 넘나드는 관객들에게 67분이라는 러닝타임은 결코 짧게 느껴지지 않는다.
  영화는 모리와 권이 어스름한 계동 언덕을 걸어가는 뒷모습으로 마무리된다. 둘의 모습과 함께 나오는‘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고 행복하게 살았대요’라는 내레이션은 영화의‘ 동화스러움’을 더욱 극대화한다. 이 마지막 장면은 사실일 수도, 모리가 꾸는 꿈일 수도, 그것도 아니라면 권의 상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셋 중 그 어떤 것이든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흐트러진 시간 때문에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졌다는 것. 시간이 분질러지면 있었던 일은 추억으로, 있었으면 하는 일은 꿈의 파편으로 남는다. 그리고 남은 것들은 뒤섞인다. 그것이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알 수 없도록. 이 세 문장으로 영화를 긴 여운을 설명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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