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무허가라고 사람도 무허가는 아입니다!”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과 우암동 사이 산자락에‘ 철탑마을’이 있습니다. 1990년부터 20년간 철거의 위험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 전합니다.
*본 기사는 취재와 자료 수집을 통해 재구성됐습니다.
 
  “집 뜯긴다!”
  1990년 10월 26일 오전이었다. 공사판 막노동 일감이 줄어드는 겨울이 되기 전에 바짝 돈을 벌어놔야 했다. 벽돌을 지고 나를 때 딸내미가 공사판으로 달려왔다. 집이 철거되고 있다고 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니 그래 가면 짤린다!” 동료가 소리쳤다“. 지금 집이 없어지게 생겼는데 이기 무슨 소용이고?”
 
   
 
  마을은 쑥대밭이었다. 철이네 집은 이미 무너지고 없었다. “깡패들이 사람 직인다!” 철거 용역업체 직원들이 마을 사람들을 향해 몽둥이를 들어도 구청 공무원들은 하늘만 쳐다봤다.
  “갑자기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 집 무허가잖아요”
  그들을 저지할 수 있는 남자들은 마을에 없었다. 68세대가 사는 마을이었지만 주민 대부분이 일용직 노동자라 집안에만 앉아 있을 수는 없었을 터였다. 산 아래에 물 길으러 갔던 엄마들이 돌아와 웃옷을 벗고 집 앞에 드러누웠다. 속수무책이었다. 포크레인도 필요 없었다. 비닐과 합판으로 만든 집은 철거 용역업체 직원들이 잡고 흔들자 속절없이 무너졌다.
  “아이고 우야면 좋노. 우야면...”
  그날, 우리 마을에서 집 13채가 사라졌다.
 
  “여기 이제 사유지니까 어쩔 수 없어요”
  구청 직원은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아니 국가 땅에 살아서 과태료도 내고 주민세도 냈는데 갑자기 사유지가 되는 게 말이 됩니까?”
  마을은 원래 국방부와 산림청 땅이었다. 박정희 정권 때는 정부에서 국가유공자에게 이곳에서 살라고 집까지 내줬었다. 포부대가 철수하고 몇몇 사람만 남았던 곳에 도시 빈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1970~80년대에 집값이 폭등하자 방세가 없어 쫓겨난 사람, 재개발철거민들이 이 야산 자락에 집을 짓고 산 것이다. 정부에서는 우리를 무허가촌 주민이라고 했다. 정권이 바뀌면서 뭐가 잘못됐는지 정부가 내줬던 국가유공자들의 집도 모두 무허가가 됐다. 마을 사람들은 국방부와 산림청에 무단 점거에 대한 과태료와 주민세를 내야 했다.
  1988년, 도시계획정비법에 의해 마을 토지가 부산외국어대학교(학교법인 성지학원)에 팔렸다. 부산외대는 마을 철거를 시도했다. 법적으로 철거 예정임을 공고해야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철거를 위한 행정대집행 영장도 본 적이 없었다. 예고도 계고도 없었던 기습 철거 이후 주민들은 철야 농성에 돌입했다. 11월 3일, 남구청과 성지학원은 주민들에게 다시 집을 짓고 살아도 된다고 했다“. 우리랑 약속했으니까, 이제 다시 철거당할 일은 없겄지” 마을 사람들은 순진했다.
 
  나라가 새천년맞이로 떠들썩하던 2000년 1월. 부산외대가 명도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소송이 시작된 지 9개월 만에 마을 사람들에게 완전패소 판결을 내렸다. 이제 부산외대는 주민들에게 예고하지 않고도 언제든지 마을을 철거할 수 있게 됐다. 법원에서는 가구당 350~800여만 원의 사용료도 내라고 했다. 1997년에 받았던 공사 중단 각서도 소용없었다. 항의하던 주민 대표는 팔다리를 붙들린 채 법원에서 강제로 끌려 나왔다. 항소하고 싶어도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처지라 변호사를 구할 돈이 없었다.
  “우리는 돈도 빽도 없으니까 우리끼리 뭉쳐야 된다”
  마을 사람들은 주거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보초를 서기로 했다. 마을 입구에 경비실도 만들고 순찰 당번도 정했다. “엄마, 엄마! 누가 와!” 아이들이 급하게 달려왔다. 마을에 낯선 사람이 보이면 아이들은 으레 불안에 떨었다. 언제 또 용역 깡패들이 들이닥칠지 모른다. 60세 노인도 새벽 4시까지 보초를 서야 했다. 방어 도구로 준비할 수 있는 것은 똥물을 삭혀서 모으는 게 다였다. 그렇게 15년이 흘렀다.
 
 
 
  그동안 마을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2003년 12월. 마을에 처음으로 가로등 불이 켜졌다. 수년간 마을 사람들이 함께 요구한 결과였다. 한전에서 전봇대가 없다는 이유로 전기 공급 요청을 거부하자 마을 사람들은 폐기되는 전봇대를 주어다가 마을에 세웠다. 한푼 두푼 돈을 모아 공동 수도도 설치했다. 아랫마을에서 끌어다 쓰면서 집주인의 전기·수도세까지 모두 내던 서러움을 덜기 위해서였다. 마을 입구 도로도, 집 앞 계단도 생겼다. 모두 마을 사람들이 만들었다.
  여전히 수도 상황은 열악하다. 한 집의 수도로 10가구가 물을 사용한다. 지대가 높아 수압이 낮기 때문에 모터가 고장 나면 물도 나오지 않는다. 바람이라도 불면 온 마을은 비상사태. 지붕이 날아갈까 봐 슬레이트 지붕 위에 타이어와 벽돌을 잔뜩 얹어두었다. 발암물질이 함유됐다는 이유로 슬레이트 지붕을 철거하면 지자체에서 지원금이 나오지만 우리 마을과는 먼 이야기다. 동사무소 직원이 우리는 무허가라서 받을 수 없다고 했다.
 
  2014년, 부산외대가 캠퍼스를 이전했다.
  “땅 팔려서 개발 시작되면 또 철거한다고 밀고 들어올낀데... 용산참사가 남 일이 아이라니까”
  언제 또 철거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마을을 뒤덮었다. 마을 사람들은 철거가 시작되면 마을회관 위 망루에 오르기로 했다. 14년간 계속된 순찰도 쉴수 없다. 오늘은 58년생 마을의 막내가 순찰 당번이다.
  부산외대가 캠퍼스를 이전한 지 반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외대에서는 빈 캠퍼스 부지 사용 계획을 알려주지 않았다. 부산시에서도 우리 마을은 무허가라서 부지 사용 계획을 알 수 있는 권리가 없다고 했다.
  “집이무허가라고 사람도 무허가는 아입니다!”
  20년간 지속한 마을 사람들의 외침은 산 메아리로만 남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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