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스타인 베블런과 <유한계급론>

 

 

 

  베블런 (Thorstein Veblen, 1857년 7월 30일 〜1929년 8월 3일)은 노르웨이 출신의 이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집에서는 주로 노르웨이어를 썼기 때문에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도 영어가 서툴렀다고 한다. 얼굴도 못생긴 데다가 말까지 더듬다 보니 거의 외톨이로 지냈는데, 그의 괴팍하고 냉소적인 성격은 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철학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기를 희망했으나, 당시에는 철학 교수직이 거의 신학교 출신자들에게 독점되어 있었기 때문에 종교적 권위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베블런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경제학 교수가 되었으나 베블런의 강의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동료 교수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다. 결혼 생활의 파탄과 사생활 문제까지 겹쳐 교단을 떠난 베블런은 결국, 192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옛 제자들의 도움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면서 고독한 말년을 보내야만 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는 처음 출현할 때부터 한편에서는 열광적인 지지자들과 다른 한편에서는 그만큼의 격렬한 비판자들과 함께 나타났다. 심지어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주의는 모든 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쏟으며 태어났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그 본질적 모순 때문에 필연적으로 붕괴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 마르크스와는 다른 관점에서, 자본주의 그 자체는 긍정하면서도 그것의 현실태(entelecheia)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사상가들도 많다. 여러 면에서 마르크스와 비교되고는 하는 독일의 사회경제학자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자본주의가 프로테스탄티즘 특히 칼뱅주의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하였다. 베버의 주장은 후대의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은 물론 많은 비판과 논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특히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베버가 정신과 현실의 관계를 거꾸로 해석했다고 비판하였다. 현실에서는 사람들이 자본주의적으로 행동함으로써 자본주의적인 정신이 나타나는데, 베버는 거꾸로 정신이 현실의 자본주의를 싹트게 한 것처럼 설명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에는 베버에 대한 오해도 없지 않다. 설령 베버의 서술방식이 오해를 받을 만한 여지를 스스로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베버는 정신이 현실에 선행한다고 주장하려는 것도 아니었고, 자본주의는 프로테스탄티즘에서 기원했으므로 윤리적이라고 옹호하고자 했던 것은 더더욱 아니다. 베버가 진정으로 주장하고자 한 바는 자본주의에는 물질에 대한 무한정의 추구와 탐욕을 적절히 제어할 수 있는 윤리가 필요하다는 것이고, 그러한 윤리를 베버는 바로 프로테스탄티즘에서 찾았다. 베버가 주목한 것은 한창 번영과 성장을 구가하던 미국 자본주의였다. 비록 물질적으로는 풍요의 절정에 있을지라도 윤리를 상실한 미국 자본주의는 조만간 결정적인 파국을 맞을 것이라고 베버는 우려하였다. 그리고 1929년의 대공황으로 미국 자본주의는 베버가 우려한 파국의 나락 속으로 떨어지고 만다.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부자임을 입증하는 요소

 

  그런데 실은 베버에 앞서서 이미, 베버가 현학적으로 던진 똑같은 질문에 대해 답변한 경제학자가 있다. 대개의 경우는 질문이 먼저 있고 답변이 있기 마련인데, 거꾸로 답변이 먼저 있고 질문이 나온 셈이다. 아무튼, 경제학의 역사에서 가장 독특한 개성을 지닌 경제학자로 불리는 소스타인 번드 베블런이 1899년에 발표한 <유한계급론: 제도의 진화에 관한 경제적 연구>가 바로 그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기본구조를 생산수단을 소유한 유산계급과 그렇지 못한 무산계급의 대립으로 파악하였다. 그런데 베블런은 자본주의를 놀고먹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유한계급과 일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노동계급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하였다. 유한계급이란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 굳이 표현하자면 놀고먹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베블런에게 ‘한가하다’는 것은 단순히 게으르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간을 비생산적으로 사용한다는 의미이다. 자본주의라는 사회경제체제에서 살다 보면 자본주의의 여러 부정적임 측면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조차도 부자를 동경하는 경우가 않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필자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데 과연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야 부자라고 불릴 수 있을까? 베블런은 자못 엉뚱한 대답을 한다. 부자는 돈을 벌지 않는다는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일한다면 진정한 부자가 아니다. 진정한 부자들은 어떻게 돈을 벌까 고민하지 않고, 어떻게 돈을 쓸까 고민하기 때문이다. 돈을 벌기 위해 고민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만큼 부자임을 확실하게 증명하는 것은 없다. 
 
 
  시간의 낭비와 금전적 낭비는 모두 부의 증거이다. 어떤 낭비를 선택하느냐는 단지 어느 쪽이 부를 더 잘 과시할 수 있는가에 달렸을 뿐이다. 가령 한 부자가 자가용 요트를 사면 다른 부자는 자가용 비행기를 산다. 한 부자가 50층 건물을 지으면 다른 부자는 100층 건물을 짓는다. 한 부자가 백작의 딸과 결혼하면 다른 부자는 공작의 미망인과 결혼한다. 부자들이 서로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한 이러한 경쟁을 베블런은 ‘금전적 경쟁’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베블런이 보기에는 이보다 더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데 효과적인 방법은 아예 돈을 버는 데 아무런 시간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시간의 낭비가 부를 과시하는 데 유용한 수단이라는 뜻이다. 물론 이러한 베블런의 주장을 반박해 볼 수도 있다. 어느 침대 광고에서 누구는 평생 4시간 이상 자 본 적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대한민국의 가장 유명한 재벌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어느 회장님은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5시에 간부회의를 열었다고 한다. 참으로 부지런한 양반들이다. 이런 예는 진정한 부자는 돈보다 시간을 낭비한다는 베블런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반박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런 부자들은 그 사람 대신 그 아내나 그 자식들이 돈과 시간을 낭비하기 때문이다. 베블런은 이러한 형태의 소비를 ‘대리적 여가’라고 불렀다. 
 
 
▲ 영국의 윌리엄 왕세손과 케이트 미들턴의 결혼식. 이 결혼식의 비용은 대략 1800억 원이 들었다고 한다. 베블런은 ‘과시적 소비’라는 말 이외에 ‘대리적 소비’, ‘대리적 여가’ 등의 용어를 만들기도 했다. 노동자계급과 중산층이 영국의 왕족이나 패리스 힐튼 같은 미국의 부유한 상속녀들의 사생활에 열광하는 이유는 아마 ‘대리적 만족’ 때문일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를 지탱하고 있는 진정한 본질은 낭비
 
 
  베블런은 부자들의 이러한 ‘과시적 소비’ 행태의 기원을 원시 사회까지 거슬러 올라가 찾았다. 인류학자들이 남태평양의 부족들에게서 발견한 선물 풍습이 바로 그것이다. 조금 단순화시켜서 비유하자면 <아마존의 눈물>에 나온 원시부족들이 일부러 입술 아래에 긴 뼈조각을 넣는다거나 과장되게 큰 성기 보호대를 차는 것이나 현대의 부자들이 명품을 소비하고 커다란 저택을 소유하는 행위는 다르지 않다. 다만 다른 것은 베블런이 보기에 자본주의에서는 이러한 낭비가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본질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이전의 어떤 사회경제체제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거대한 생산력에서 찾았다. 그런데 베블런이 보기에 자본주의의 진정한 특징은 생산력이 아니라 그보다 더 거대한 낭비력에 있다. 마르크스의 유산계급은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축적하는 계급이다. 하지만 그렇게 축적된 부가 소비되지 않는다면 과연 무한한 축적이 가능한가? 그렇지 않다면 그 부는 과연 누가 어떻게 소비하는가? 베블런보다 100년 전에 맬서스는 유명한 <인구론>에서 자본가는 소비하지 않고 축적하는 계급인 반면 노동자는 너무 빈곤하여 소비할 수 없으므로, 지주처럼 생산에 기여하지 않고 낭비만 하는 계급이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직접 맬서스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베블런은 맬서스의 주장을 좀 더 심오한 형태로 제기한다. 낭비야말로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불가결한 자본주의의 본질이라고. 
 
 
  자본주의의 낭비적 본질은 비단 소비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저작인 <영리기업의 이론>에서 베블런은 생산의 측면에서 자본주의의 낭비적 본질을 고발한다. 자본주의에서 기업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회적 효율성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으며, 오직 영리 즉 자신들의 이윤에만 관심을 가진다. 그래서 기업은 사회 전체가 공동으로 누려야 할 기술의 혜택을 독점함으로써 거대한 이윤을 축적하게 된다. 유한계급이 낭비하는 부도 실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이윤을 위한 생산은 자원의 낭비를 초래한다. 그렇다면 이런 낭비의 끝은 어디일까? 세상을 떠나면서 베블런은 자본주의, 특히 20세기의 미국 경제가 낭비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위기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그의 예언이 대공황으로 실현되기까지는 불과 두 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 조준현경제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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