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텔레비전에는 아이들을 전면으로 등장시킨 프로그램이 심심찮게 방송되고 있다. 귀엽고 순수하며 재기발랄한 아이들의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많은 흥미를 안겨준다. 때때로 이들 프로그램은, 아이들이 어른 못지않은 깊은 생각을 담고 있음을, 어른들보다 더 속 깊고 정겨운 모습이 있음을 넌지시 알려주기도 한다. 아이들은 단지 세상 물정 모르고 천진난만한 ‘동심’이 아니라 우리가 늘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임을 이들 프로그램은 시청자들에게 깨닫게 하려는 듯하다. 이 때문인지 몇몇 아이들은 웬만한 연예인 이상의 인기와 관심을 받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고 그 아이들이 일반 연예인처럼 특출한 재능을 갖고 있거나 뛰어난 외모를 가졌기에 텔레비전에 출연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가 유명인이라는 점만 빼면 여느 아이들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평범한’ 프로그램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세월호 침몰 이후 우리는 아이를 제대로 키우는 것이 이 사회에서 얼마나 힘든 것인지 똑똑히 목격하고 있다. 아니, 세월호 침몰과 그 이후의 수습 과정은 우리 사회가 아이를 제대로 키우고 보호할 수 있는 제반 환경을 전혀 마련하지 못했음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한 가정의 부부가 아이를 하나 이상 낳지 않/못하는 작금의 세태에서, 그 아이마저 국가는 전혀 보호하거나 배려할 뜻이 없음을 잘 보여준다. 이제 국가나 사회라는 공공 영역이 아닌,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 아래서만 아이는 키워지고 자라날 수밖에 없다. 국가와 사회시스템이 제공하는 공공 서비스는 더 이상 아이들을 ‘안전’하게 키울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주지 못하는 것으로 판명됐다. 세월호의 침몰은 일반적인 사회구성원이라면 누구나 경험했을 고등학교 수학여행에서 벌어졌고, 올해 초 한 대학교 신입생환영회에서의 발생한 끔찍한 기억 또한 공식적인 행사에서 벌어졌다. 잊을만하면 발생하는 보육원 아동 폭력이나 입에 담기에도 끔찍한 아동 성폭력이 공공보육시설이나 공공장소와 같이 누구나 사용 가능한 시간과 공간에서 주로 벌어진다는 점은, 기실 공공적인 시공간이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버려진 시공간에 불과하다는 점을 확인해준다.

그러니 믿을 수 있는 것은, 내 유일한 핏줄이 안전하게 클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것은, 사적(가정-가족-집)이거나 이에 준하는 시공간(고급 사립교육기관) 뿐이다.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여행이벤트’를 제외하고는 그저 집안 거실에서만 뛰어 논다. 여행을 가서도 어른과 아이에게 의미 있는 시공간은 둘만이 함께 있을 때다. 타자와 상호 접촉 가능한 시공간에 있을 때조차 아이는 부모라는 사적 관계를 매개할 때에만 그 시공간에 들어선다. 안전한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부모와 아이의 사랑스런 이벤트를 대리 체험함으로써 우리는 이미-항상 ‘안전’을 환상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프로그램들은, 놀이‘터’ 대신 놀이‘방’으로 향하는 우리 아이들의 서툰 발걸음 뒤에 늘어진 ‘불안’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 불안은 아이가 죽은 원인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 최소 46일은 단식해야 하는 나라, 그럼에도 최고공공권력기관은 그 ‘침묵으로 외치는 목소리’를 외면하는 나라에 살고 있는 한 어쩔 수 없는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아이를 위한 나라는 여기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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