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성우 강수진

   
 

“어서 와요” 익숙한 목소리가 기자를 반겼다. <슬램덩크>의 강백호, <원피스>의 루피, <드래곤볼>의 손오공, <명탐정 코난>의 코난, <이누야샤>의 이누야샤까지. 주인공이란 주인공은 죄다 연기한 강수진 성우의 목소리였다. TV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목소리에, 초면에도 친숙한 기분이 들었다.

최근 <겨울 왕국>, <셜록> 등이 큰 인기를 끌며 ‘더빙도 괜찮네’라는 말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이와 함께‘목소리로 연기하는’ 성우가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환경은 그리 밝지만은 않다. 열악한 작업 환경과 적은 수익, 일부 성우에게 일이 집중되는‘부익부 빈익빈’ 현상. 그나마 있는 일마저‘스타’들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게임부터‘보이 스웹툰’까지 성우들이 활동할 수 있는 새로운 콘텐츠가 늘어나고 있지만, 그만큼 빼앗기는 것도 늘어나고 있다.

25년 경력의 베테랑, 강수진이 말하는 성우계는 현재 ‘혼란기이자 과도기’이다“. 변화를 예견하고 대비할 수 있는 역량까지 갖춰야 한”다고 답하는 믿음직한 강수진 성우의 목소리. 그를 만나 성우라는 직업과 열악한 성우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봤다.

목소리로 연기하는 배우, ‘성우’ 강수진

△굉장히 많은 배역을 맡아왔다. 애니메이션만 해도 수백 개에 달하는데. ‘독점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그런 지적이 많았죠. '한국에는 강수진 밖에 없나?’ ‘왜 강수진만 쓰나?’ 그런 얘기가 나오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제가 한창 활동하던 시기에는 10대 남자의 음색을 연기할 수 있는 성우가 그렇게 많지 않았어요. 그런 ‘소리의 조건’도 있었고. 또 제 나름대로는 사춘기 아이들의 정서가 무엇인지, 그들의 언어가 무엇인지 연구해서 연기에 반영하려 했어요. 보통은 맑고 아름다운 목소리가 나오는 것을 좋아하잖아요? 그런데도 저는 목소리가 걔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솔하고 사실적인 목소리를 전달하려 애썼어요. 그것이 감성적으로 통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 많은 배역을 맡은 만큼 캐릭터마다의 차별성에 대한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어떤 식으로 극복했나?

많은 배역을 맡았지만 이미지가 비슷한 캐릭터가 대부분 이었어요. 특히 애니메이션에서는 ‘열혈 캐릭터’를 많이 연기했죠. 덕분에 인기를 얻었고요. 다만 다른 성격의 배역을 맡는 경우에는 변화를 주려고 노력해요. <셜록>의 모리 아티는 드라마 자체의 의식세계를 지배하는 절대악의 배역이에요. 그런데도 화면 노출 비중이나 대사량은 많지 않아요. 그게임팩트가 굉장히 강하거든요. 그 짧은 시간에 강한 인상을 주려니 부담이 많았어요. 녹음 당일에는 아침부터 말도 잘 안 하고, 우울한 기분으로 삐딱하게 쳐다보고. 단 세 시간 녹음임에도 종일 그러고 있죠.

△힘들지 않나? 단시간 내에 많은 장면을 녹음하고. 급격한 분위기 전환도 잦을 것 같다

굉장히 어렵죠. 드라마든 영화든 한 장면을 찍기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하잖아요. 영화 한 편을 찍는 데 최소 6개월, 길게는 2년 이상 걸리는데, 더빙 작업은 그만큼의 분량을 불과 대여섯 시간 안에 해내야 한다는 거죠. 단순한 순발력이 아닌 통찰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뛰어난 감성도 필요한 직업이죠.

△ 아무래도 성우라는 직업은 노출되는 부분이 목소리밖에 없기에 그 개성도 중요할 것 같다. 하지만 많은 배역을 하려면 다양한 목소리가 필요할 것도 같은데, 상충되지 않나?

성우에게 있어서 목소리는 일반 배우의 외모와 같아요. 일반 배우들이 다른 캐릭터로 분할 때, 이를 위해 우선되는 작업이 바로 외형을 바꾸는 거잖아요. 머리부터 발 끝까지 외모를 바꾸는. 성우는 이걸 목소리에 적용시켜요. 기본적으로 성우는 목소리를 컨트롤하는 능력이 전문적으로 뛰 어나요. 말투나 물리적인 음색, 소리의 톤 자체를 변형시켜 최소 4~5개의 목소리는 표현해낼 수 있어야 해요. 물론 개성 있는 본연의 목소리가 기본적으로 뒷받침돼야 하죠.

점점 사그라드는 ‘그들’의 목소리

△성우들의 활동 범위가 줄어들고 있다. 특히 극장 애니메이션 시장의 경우 개그맨, 아이돌, 스타 배우들의 활동 범위가 넓어져 성우가 위축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쏟아지고 있는데

그렇죠. 단순히 인기에 영합해 캐스팅하면 결과물의 완성도를 떨어트릴 수 있어요. 결과적으로 그런 완성도 떨어지는 작품이 티켓파워와 연결되지는 않거든요. 오히려 평만 나빠지죠. 문제는 이런 실패로 인한 피해가 성우들에게 돌아온다는 거예요. 기획 자체의 문제인데, 관객들은 ‘더빙은 재미없다’는 인식을 갖게 되는 거죠. 당장 개런티의 차이가 큰 것보다 그 뒤의 후유증까지 감당해야 하는 게 문제죠. 돈에 대한 박탈감은 잠시에요. 그 후유증이 더 큰 거죠.

△그렇다면 성우들의 활동 범위를 위해 이들의 활동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나?

사실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아요. 성우에 비해 개런티가 100배 이상 많은 경우도 있어 상대적 박탈감이나 심리적 위축, 자괴감이 있기는 하지만요. 저는 ‘성우의 일은 성우만이 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어차피 성우나 영화, TV, 뮤지컬, 연극. 모두 본질적으로 같은 ‘연기의 울타리’ 안에 있으니까요. 능력이 있으면 넘나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연기라는 영역은. 성우 고유의 영역은 아닌 거죠. 장르 나름의 특성과 전문성이 있잖아요. 이를 소화할 수 있는 사람들이 와서 해야 해요. <겨울 왕국>이나 <셜록>은 완성도가 워낙 높다보니 관객들도 ‘더빙도 재밌다’라고 재인식하게 됐잖아요. 성우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스타가 와서 더빙을 하더라도 이런 긍정적인 효과가 필요하다는 거죠. <업>이라는 애니메이션에서 이순재 선생님이 주인공을 연기하셨는데, 저는 감동받았어요. 싱크로가 딱 100인 거예요. 이런 작품이 필요해요.

△더빙에 대한 인식 자체가 성우들의 존재가치와 직결되는 문제인 것 같다. 성우로서 더빙이 왜 필요하다고 생각 하나?

물론 원형 자체도 중요하지만 자막에 눈을 빼앗기다보니 놓치는 것들이 많아요. 영상물에서는 영상 자체가 제일 중요한 것임에도. 물론 그 선호도는 관객에 따라 다르겠죠. 그 때문이라도 선택은 관객이나 시청자가 할 수 있어야 해요. <셜록>은 그렇게 하고 있잖아요? 더빙과 자막의 선택. 특히 다양한 연령층이 보는 영상물의 경우 반드시 필요한 서비스라 생각해요. 자막이 부담스러울 수 있거든요. 쫓아 갈 수가 없어요. 프레임 안에 들어가는 글자 수도 제한돼있어 정확한 의미 전달도 힘들고요.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국어를 위하는 차원에서도 필요해요. 청소년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굉장히 크거든요.

△직업 활동 여건이 굉장히 불안정한 것으로 알고 있다. 공채는 나날이 줄어들고, 공채되더라도 2년 계약직. 게다가 계약기간이 끝나면 방출돼 프리랜서로 활동해야 한다 던데. 안전망이 전혀 구축되지 않은 것 같다

가장 큰 원인은 방송국의 행태에요. 이 구조는 오로지 방송국에만 좋은 시스템이에요. 2년간의 전속기간에는 임금도 굉장히 낮기 때문에 마음껏 이용하고. 기간이 지나면 방출하고, 다시 공채하고. 이런 시스템이 성우시장의 구조를 무너뜨리고 있어요. 시장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방송국 사정에만 맞추는 거죠. 굉장히 불합리해요.

△공채를 통과하지 않으면 성우로 일하는 것 자체가 힘들다고 들었다. 공채되지 않은 언더성우들도 많다던데

공채를 할 수밖에 없죠. 성우협회에 등록되는 기준도 공채 여부에요. 예전에는 그것을 트레이닝 과정으로 봤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잖아요. 오히려 싼 값에 성우 노동력을 사용하기 위한 방편이 돼버렸어요. 이제는 성우의 수급 조절을 방송국이 아닌 성우들이 직접 할 수 있어야 해요. 성우협회에서 교육, 양성부터 선출까지. 성우의 권익을 스스로가 보호해야죠. 언더성우들도 감싸야 해요. 언더성우의 존재 자체가 시장을 잠식하고 있거든요. 싼 값에 일을 맡아 시장 전체를 하향평준화 시키죠. 서로에게 좋지 않은 시스템이에요. 성우협회가 권리를 갖게 되면 그 부분까지 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시스템 바꾸려면 ‘우리’부터 바뀌어야

△일본의 경우 성우 시스템이 굉장히 잘 돼있다. 물론 배경 자체가 다르겠지만, 본받아야 할 점도 있을 것 같은데

일본 성우 시스템은 우리나라 연예인 매니지먼트 시스템과 유사해요. 회사에서 성우를 양성하고 관리하죠. 성우도 대중예술인이기에 그런 형태가 가장 좋을 수 있어요. 다만 시장크기가 차원이 달라 우리나라에서는 쉽지 않아요. 우리나라는 수익성이 보장되지 않으니까. 사업성이 없어요. 성우의 가치를 올리는 일이 선행돼야 해요.

△성우의 가치를 올리는 일이라면?

성우라는 직업만으로는 가치가 올라가기 힘들어요. 제작자나 방송국에서 좋아하지 않거든요. 비용이 올라가니까. 제가 요즘 시도하고 있는 일이 있어요. 성우 출신의 연예인을 관리하고 있죠. 성우라는 직업을 근본삼아 다른 연예활동을 병행하는 거예요. 대중성이나 인지도가 올라가면서 전체 성우의 인지도가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외 모지상주의, 외모의 상품화라는 문제가 생길 수도 있죠. 다 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거예요. 성우적인 능력이 전제돼야 하는 것이 당연하죠. 그게 갖춰진 후에 외모가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해야 하죠. 가요계도 마찬가지잖아요. 가수 본연의 실력이 다소 모자라더라도 활동을 하고 인기를 얻 잖아요? 어찌됐건 대중들은 그 사람들을 가수로 본다는 거죠. 가수라는 직업군으로. 그러면서 직업 자체의 가치가 높아질 수 있는 거죠. 성우도 그게 필요하다는 거예요. 살기 위해서. 너무 침체돼있어요, 지금은.

△직업 특성상 매체 노출 빈도가 적어 이미지 구축이 쉽지 않을 것이다. ‘아이돌성우’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이 필요할 것 같은데

조심스럽게 판단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많은 성우들이 이미지를 알리는 작업도 필요하지만, 모든 성우가 그렇게 한다면 역효과를 볼 수도 있거든요. 노출이 도움이 되 는 사람이 있고, 안 되는 사람이 있고. 오히려 실제 이미지를 노출시키지 않았기에 가질 수 있는 좋은 이미지마저 상쇄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때문에 그걸 관리할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거죠. 그게 바로 매니지먼트. 시도하고 있는데, 쉽지는 않네요.

△시장 자체의 활성화도 동반돼야 할 듯하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애니메이션에 대한 인식은‘어린이나 청소년을 위한 콘텐츠’잖아요. 그런데 15세 이하 인구는 해매다 줄고 있는 데도 성우 지망생들은 해마나 늘고 있어요. 25년 내내 공채 경쟁률이 150:1을 유지하고 있어요. 이 걸 우리나라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캐치를 못하고 있어요. 이제는 성인들도 애니메이션 소비 영역에 발을 들이게 된 거예요. 성인을 위한 콘텐츠가 제작돼야 시장이 유지, 발전되고 신장된다고 생각하는데, 아직까지는 그런 움직임이 없어요. 내수가 탄탄해져야 애니메이션 시장도 탄탄해지고, 성우 시장도 함께 살아날 수 있을 텐데‘. 아이돌 성우’ 시도가 성공하려면 이 부분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시도가 성공한다면 다른 직업군이 성우의 영역에 들어온 것처럼 성우도 다른 직업군으로 펼쳐나갈 수 있게 될 것 같다

물론이죠. 그 사람들이 우리 일을 하는 만큼, 우리도 다양한 영역의 활로를 열어 나가야 해요. 그게 무섭다고 우물 안에만 갇혀 있으면 자멸하는 거죠. 오히려 일부의문을 열어주되 들어오는 만큼 우리도 나가야 해요. 그래야 고유의 영역도 보전되면서 교류할 수 있다는 거죠. 시장은 확대되고 가치는 높아질 거예요. 요즘 같은 시대에 누가 문 잠그고 담 쌓고 살아요? 자멸이에요, 자멸.

△교류가 활발해지면 주목받는 일은 스타가 모두 가져가 지 않을까? 의외로 성우들이 맡고 있는 일이 많다, 주연이 아니라 그렇지. 숨은 존재감이라 해야 하나. 양념 같은 역할. 이런 주목받지 못하는 일만 성우가 맡게 될 부작용이 걱정된다. 사회적인 인식 자체가 개선돼야 하지 않나?

인식이 어떻게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제가 요구하거나 당부하기가 쉽지 않아요. 성우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까요? 우리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데, 대중의 인식이 어떻게 바뀌겠어요. 우선 우리가 변하려 노력해야죠. <겨울 왕국>이 좋은 예가 될 수 있겠네요. 다만 이런 점은 있어요. 질타도 좋고, 욕해도 좋으니 관심을 가져달라고. 시청자들이 더빙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관심을 가져야 좋은 작품도 주목을 받고, 성우에 대한 인식도 개선되지 않을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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