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이 넘는 세월동안 민중의 ‘주경야독’ 돕다

▲ 1980년대 검정고시 야학 '우리'의 교지이다. 강학들의 격려사와 학강들의 작품이 실려있다.

정규학교에서 교육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야간에 열렸던 학교, 야학. 야학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성격과 형태를 달리하며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학강(야학에서 학생을 이르는 말)들의 배움터에 빛을 비추고 있다.

농민과 노동자에게 배움을

1910년대에 처음 등장한 야학은 정규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야간에 수업을 실시하는 비정규적 사회교육 기관으로, 일제강점기에 크게 발달했다. 일제 강점기에 애국계몽운동가들이 설립한 사립학교들이 민족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일제의 탄압을 받아 폐교 당하자,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많은 야학이 생겨났다. 하지만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민족 분단으로 인해 일시적 단절을 겪었다. 들빛야학 이 형은 강학(야학에서 교사를 이르는 말)은 “당시 야학은 일제 치하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가르침과 배움을 통해 서로 위로하는 공동체의 역할을 했다”고 전했다.

이후 1960년대까지의 야학은 가난으로 인해 제도권 교육에서 소외당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문맹 퇴치를 위해 진행됐다. 그러다가 60년대 후반 급속한 경제발전 속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도시 빈민층으로 전락하게 되고, 더욱 많은 사람들이 교육에서 멀어졌다. 이형은 강학은 “1960년대 당시 사회모순과 불평등을 인식한 노동자들의 수가 많아지면서 극빈자 및 노동자를 주 대상으로 한 노동 야학이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부조리한 현실에 눈뜨게 하다

한국전쟁 이후 근대화·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야학의 성격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직후에는 대학생들이 나서서 소외된 도시 빈민과 노동자 등을 교육했다. 주로 검정고시 대비를 위한 비정규적 학교의 성격이었다. 그러나 차츰 사회의 부조리와 현실에 대해 불만을 가지기 시작한 민중들이 사회 문제 해결에 관심을 가졌고, 야학이 사회운동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1980년대에 야학에서 학강들을 가르친 최영석(재송동, 55) 씨는“당시 야학에서는 검정고시나 한 글뿐 아니라 노동법과 국사를 포함한 사회 과학 관련 수업도 많이 했다”며 “사회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새 교육’을 하려고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당시 독재 정권은 야학활동을 좌익 학생들의 혁명으로 규정하고 강학과 학강들을 탄압했다. 야학을 사회주의 혁명조직으로 낙인찍은 것이다. 김영진(분자생물) 교수는“유신이 선포된 상황에서 조용히 대학 생활을 하기에는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며 “사회 참여적인 활동을 하고자 대학생들이 주도해 야학활동을 했다”고 전했다.

100년이 지나도 꺼지지 않는 학구열

최근 야학은 인간관계를 맺음으로써 공동체를 지향하는 성격도 이어지고 있다. 새마음야학 길봉재 교장은“야학이 처음 생겼던 1980년대에는 청소년 학강들이 많았지만 요즘에는 5 ~ 60대 성인 학강들이 많다”며 “학강들의 연령대가 바뀌었을 뿐 배움의 때를 놓친 사람들이 모여 공부한다는 야학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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