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선거가 끝났다. 세월호 참사로 인해 유세는 조용히 진행됐지만 들끓던 분노가 어디에, 얼만큼 반영되었는지는 헤아리기 어려운 결과였다. 어떠한 잘못이 저질러져도 1번으로 향하는 굳건한 표심을 다시금 확인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빨강으로 빽빽한 기초단체장 분포도는 어떻든 난감하고, 진보정당의 궤멸은 도리없이 암담하다. 무엇보다도무지 새롭지 않은 이 ‘새[新]’당과 저 ‘새’연합의 의석에 일희일비해야 하는지 의심스럽다. 우리의 미래를 결정짓는 선택지로선 너무 빈한하지 않은가.

많은 이들의 지적대로, 세월호 참사의 주된 이유는 돈 중심의 신자유주의였다. 이 극악한 자본주의는 집권당이 어느 쪽이건 간에 선택되고 추진되었으며 꾸준히 강화되어 왔다. 양당제 자체가 자본과 기업에 우호적인 보수 정당의 집권 가능성을 높인다는 연구(최태욱)도 있거니와 신자유주의의 대표격인 미국과 영국이 양당제를 채택한 반면, 복지국가의 전범으로 삼을만한 독일, 스웨덴, 덴마크 등은 모두 복수의 다당제를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중도파가 대개 보수보다 진보 쪽을 파트너로 택해 중도좌파적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이로써 분배나 복지에 관해 보수층의 저항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지난 대선 이후 여야 공히 복지 정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쉽게 마음을 내어주기 어려운 이유는 그 때문이다. 체질상 쉽지 않다.

아울러 대의제 또한 돌아봐야 한다. 이를 일러 “투표를 할 때만주인이 되고 선거가 끝나면 노예로 돌아가는 제도”라고 혹평한 이는 루소였다. 승자독식의 대의제는 대규모 조직을 등에 업은 직업 정치인의 당선 이외 다른 경우를 생각하기 어렵다. "투표를 해서 의원이나 정당을 선택하고 법률을 통과시키는 것이 사회를 바꾸는 것이란 생각은 18~19세기의 근대 대의제 민주주의에 입각한 사고방식일 뿐”(오구마에이지, <사회를 바꾸려면>)이라는 단언은 더욱 여실해진 한계를 상기시킨다. 과연 ‘나’를 대리하는지 의심스러운 이 귀족풍 엘리트들은 오히려 권력화하여 부정을 저지르거나 군림하려 들기 일수 아니었던가. 세월호 참사의 배경인 부패의 카르텔에 이 유력한 정치꾼들이 결코 빠질 수 없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만히 있지 않고’해야 할 일은 시민사회의 역량을 키우는 일이어야 한다. 어떠한 매개도 없이 국가와 피해자가 맞대면하고 그리하여 기대든 분노든 오직 국가에 걸어야만 했던 세월호 참사는 우리 시민사회의 빈약함을 그대로 드러냈다. 시민사회가 허약한 나라에선 많은 문제를 개개인의 비극 정도로 치환시키고, 조직되지 않은 분노는 그때 뿐 곧 휘발되기에 권력은 두려움을 모른다. 숱한 참사를 겪고도 세월호 비극이 일어난 이유 중에는 선주와 해수부 관료의 유착을 감시할 시민단체가 단 하나도 없다는 우리의 ‘빈약함’ 탓도 크다. 한 표를 행사하는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시민단체 한군데 정도는 후원하는 일이 간절하다. 높은 수준의 복지가 실현되고 있는 유럽 국가의 시민들이 여러 군데의 시민단체를 동시에 후원한다는 사실은 무얼 말하나. 다당제를 채택하고 대의제를 보완하면서 직접 민주주의를 상당히 실현하고 있는 이들이 시민단체의 역량을 키우는 일에도 열심인 것이다. 어느 쪽이 선후인지는 자신할 수 없으나 하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세상은 결코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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