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시장에서 매력이라는 것은 계측할 수 없고 불규칙적이고 불확실한 반응이 동반된다. 사회경제적 자원이라고 할 수 있는 집안, 학력, 직업, 연봉으로 환원되는 것도 아니며 (그런 조건 자체는 완벽한데도 불구하고 비인기남으로 분류되는 사람도 많고) 키나 몸매 그리고 외모와 같은 신체 자원이 결정적인 요인처럼 보이긴 하지만 또 의외로 그렇지 않는 사람들이 인기를 끄는 예도 넘쳐난다. 결국 매력이라는 것은 객관적 가치로 이뤄져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소비하는 당사자에게만 해당하는 유용한 가치이다.

상대에게 내 매력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둘 사이의 거리조절이 우선되어야 한다. 가까이 두고, 오래 봐야 예쁘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연애를 잘 하려면 사람과 관계를 맺고 그것을 유지해 나가는 관계의 기술이 필요하다. 여자들이 나를 좋아해주고,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섹스를 하고 싶다면, 그동안 외로움과 거절 그리고 성취되지 못한 욕망 속에서 괴로워하며 살았다면 그는 칼로 사람을 찌르거나 무차별 총기 난사 같은 선택을 해서는 안 된다. ‘사람과 관계를 맺고 싶다’라는 절규는 폭력성이 아니라 자기 쇄신이 바탕이 된 뒤 드러나야 한다.

지난 주 캘리포니아에서 발생한 22살 대학생의 총기 난사 사건이 보도된 후 남성 커뮤니티에서는 ‘22살? 아직 애송이가! 30살 즈음 되었을 때 그랬으면 몰라도’ 혹은 ‘저 정도 생긴 데다, 좋은 차 타고, 부모 직업도 좋은데 한국이었으면 인기 폭발이었겠지’와 같은 반응이 일었다. 사건의 핵심을 제법 벗어난 포인트라고 생각했다. 30살까지 동정이면 저런 분노가 합당하다는 말일까? 사회적 조건이 좋으면 당연히 여자들이 따를 거라고 생각하는가?

연애와 성의 자유화와 더불어 시장화가 진행되면서 소위 성적 강자와 약자가 생겨났다. 인기남에게 여자들이 집중하게 되면 소외된 비인기남, 특히 자본력도 갖추지 못한 자들은 연애 시장에서뿐만 아니라 성을 매매하는 시스템에서도 밀려나게 된다. 그렇게 좌절된 욕망은 사회 시스템을 탓하거나 자비나 절제 없이 자원을 끊임없이 탐하는 같은 남성의 욕심을 욕할 것이라고 생각되겠지만 그건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 자신이 모자라다는 걸 인정하는 꼴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여성에게 분노하고 여성을 혐오했다.

이성적 강자와 약자의 개념도 대단히 남성 중심적이다. 여성 역시 여러 가지 기준으로 남성들에게 평가받고 좌절을 경험한다. 그럼에도 여성에 의한 무차별 살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 의아스럽지 않은가. 좌절한 남자들에게 여성은 분명 자신보다 연약하고 약한 존재인데, 그런 것들이 자신을 거절하고 상처를 줬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인간과의 관계라기보다 남성성을 획득하기 위한 여성의 소유 그 이상도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여자들이 잘 자주고 순종적이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멍청한 생각을 한다. 문제의 핵심을 교묘히 빗겨 나서 자신의 자존심을 보호한다. 그러나 그 자존심도 여자가 세워주지 않으면 안되는 허약한 것임을 모른 채 말이다.

거절당했다면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키워라! 커뮤니케이션이란 달콤한 공감이 아니다. 자아를 판돈으로 내건 필사의 줄다리기이다. 그게 싫다면 관계를 포기해라. 우에노 치즈코의 말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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