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한 달이 지나는 동안 추한 민낯을 드러낸 데가 한 두군데가 아니지만, 특히 언론이 드러낸 밑바닥은 참담했다. 거대한 비극은 상품이 되고, 앞다퉈 슬픔을 전시하려는 그들의 분주함엔 언론의 기본만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예의도 송두리째 결여되어 있었다. 결코 납득할 수 없는 보도가 동시다발적으로 잇달았고, 차마 마주하기 힘든 참사는 그로 인해 거듭 비극이 되었다. 마이크와 카메라를 마구잡이로 휘둘러 대는 언론을 국민들은 ‘기레기’라 명명했고, 이따금씩 쓰이던 이 경멸의 별칭은 불행히도 이제 ‘성공한 은유’가 되어 널리 퍼졌다. 국무총리에게 던진 물병이 정권에 대한 절망의 상징이라면, 멱살이 잡힌 취재진은 언론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라 할 것이다. 이 분노는 정권에 대한 그것보다 덜하지 않고, 대개는 언론 스스로가 자초하였다.

사고 초기부터 ‘전원 구조’라는 대형 오보를 냈다. 그 절박한 순간에 정부 발표를 그대로 받아쓴 오보가 아니었다면 더 많은 이에게 구조의 손길을 뻗칠 수 있었을 텐데 책임은 묻지 않았고, 자성은 없었다. 대신 시청률과 클릭수와 단독과 속보에 목을 맨 게걸스런 야수떼가 현장으로 몰려갔고, 관계 당국의 해괴한 대응과 짝패마냥 저급한 보도가 연이었다. 막 구조된 학생에게 “친구가 죽은 사실을 알고 있느냐”물었고, 홀로 살아남은 여섯 살짜리 아이에게 “엄마 아빠 어디 계시냐”는 질문을 던졌다. 아직 수백의 생명이 차가운 바다에 있는 그때, 추후 보상금을 계산하는 지상파와 특정 보험 상품을 광고하는 인터넷 언론, 사고 학생들의 학교로 숨어들어가 피해 학생의 소지품을 꺼내어 촬영한 통신사가 있었다. 차마 언급하기도 어려운 기괴한 수준의 ‘어뷰징’ 기사는 이미 또 하나의 언론이 된 포털사이트에선 흔해빠진 일이었다. 이것은 저열한 폭력이고, 명백해진 한국 언론의 수준이었다.

소위 유력 언론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했는데도, 공영방송의 부장이란 자는 잠수사의 죽음을 유가족의 탓인냥 훈계말씀을 내놓고, 재난 주관 방송국의 국장이란 자는 사고 희생자를 교통사고 사망자에 비교하며 “그리 많지 않다”고까지 말한다. 이것은 엽기고 잔혹이다. 마침내 소속 직원들이 성명서를 내어 정상화를 촉구했고, 적잖은 이들이 신뢰도에 긴가민가하던 한 종편 채널과 해직 언론인이 주축이 된 매체들로 눈을 돌려버렸다. 이미 슬픔으로 탈진한 유가족이 분노를 추슬러 방송국으로 향한 그 와중에, 청와대가 이들 인사와 관련 보도를 통제했다는 증거가 하나둘씩 나오고 있으니 저들에게 무슨 기대를 걸어야 한단 말인가. 그러므로 “세월호 보도, 그 자체가 참사”란 말과 “세월호 선내 방송 같은 언론”이란 표현들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한 지인은 이번 사태를 지켜보면서 한국 언론을 더는 못믿겠다고 토로하며 외국어를 공부해서 그 쪽 언론을 통해 뉴스를 접하겠다고 말했다. 받아쓰기, 베껴쓰기에서 한 걸음도 더 나가지 않는 기자들, 취재를 통제 한 병원 측에 항의하는 카메라맨, 과거의 참사보도 양태를 그대로 답습하는 데스크, 어슷비슷한 뉴스를 쉴 새 없이 양산하는 온라인 매체들, 정권의 나팔수를 자처하며 공공의 전파를 사용(私用)하는 임명직들, ‘계란도 풀지 않은 라면’을 보도했다고 청와대 출입을 금지시키는 저들. 꿈쩍도 않는 그들을 보고 있자니 솔직히 가망이 없어 보인다. 그가 현명한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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