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을 선택하면서까지 사랑의 가치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사랑을 하는 데 있어서 자본의 가치가 더 커지는 것이 기묘하다. 납득할 만한 전공(혹은 직업) 이나 경제적인 수준까지 다 따져가며 관계를 맺겠다고 한다면 그 연애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일종의 쇼, 보여주기식 연애 이외에 두 사람이 어떻게 교집합을 확장해 나가고 서로를 믿을 수 있을까? 결국 그 관계가 욕망하는 것은 그 인간의 조건이다. 특히 물질적 가치만을 탐하는 것이다.

중앙일보에 실린 <청춘리포트 - 연애의 조건, 어디 살아요>라는 기사를 읽고 뜨악한 기분이 들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이 상대의 학력과 직업과 같은 정보보다 더 우선해서 파악하는 것은 상대가 사는 곳이라고 한다. 그 이유인즉슨 거주 지역은 상대의 재력뿐만 아니라 부모님의 재력까지도 반영하기 때문이다. 부의 역사까지 파악하려 들다니 참으로 가상하다. 특히 강남, 서초, 송파구에 살면 연애의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 기사의 대상은 서울 지역으로 한정되어 있지만 부산에서도 부유한 동네와 그렇지 않은 동네가 엄연히 존재하기에 얼마든지 이런 조건으로 연애 상대를 선별할 수 있다.

청춘의 사랑이라면, 특히 그 시절에만 가능한 서로에게 빠져들어 눈먼 사랑을 하는 것이라면 이런 조건들을 비웃어줘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사랑은 실상엔 존재하지 않고, 가난을 견뎌내면서까지 연애를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것이라고 지금 현재를 사는 젊은이들은 판단하는 것일까?

연애에서 자본의 가치가 중요해지면 결국 연애나 사랑은 계산기 위에 올라간다. 여자들은 연애시장에서 자신의 가치를 물질로 환원시킨다. 오빠가 사준 가방, 오빠가 데려 간 맛집, 오빠가 쓴 돈만큼 자신이 값어치 있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섹스하기 전에 훨씬 더 까다롭게 굴어야 한다고 믿는다. 사랑하기 때문에 뭐든 해주고 싶어 하던 남자들도 이제는 더 많이 희생하거나 손해 보려고 하지 않는다. 사랑이라고 믿고 싶겠지만 그 욕망의 근원은 결국 섹스이고 그 급한 마음에 호구가 되기 십상이라는 걸 깨달은 남자들도 영악하게 굴기 시작한다. 손익분기를 따지려든다는 말이다.

그렇게 양쪽 진영에서 서로 재고 계산하면 대체 사랑은 누가하고 섹스는 어떻게 하나. 어느 누구도 행복해질 수 없는 제로섬 게임을 펼치며 승리를 자축할 수 있는 것일까? 결국 누군가는 착취당하게 되는 것이 그 결말인가. 청춘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사랑을 하 고 인간다운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사회의 구조를 자본화하고 모든 가치를 돈으로 환원시킨 것들에 저항할 필요가 있다. 거창하고 위대한 투쟁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해야 하는 것들에서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우선은 각종 기념일 챙기기 같은 것. 그런 날의 선물이나 이벤트는 찰나의 만족과 기쁨 이외에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다. 투자한 것에 대한 아까움을 증폭시킬지언즉 관계를 공고하게 만들어주진 못한다. 아까워서 헤어지지 못한다는게 과연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일까? 자본 사회에서는 연인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소비하게 만든다. 무언가 함께 해야 하고, 사야하고, 봐야하고, 먹어야 연애답다고 믿게 만든다. 돈을 쓰지 않으면 사랑을 증명할 수 없는 것처럼 만들었다. 그런 사회 구조는 위험하다는 걸 인식해야 한다. 당신의 연애가 호구짓 그 자체임을, 현명한 연애는 소비로써 그 관계를 증명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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