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구조자는 0이다. 사고 당일, 구조자라기보다 ‘탈출자’에 가까운 170여 명 남짓한 이들 이외에 살아서 돌아온 이는 없었다. '170여 명’이라고 얼버무릴 수밖에 없게끔 사고 발생 25일이 넘어가는 지금까지도 당국은 오락가락 발표를 번복한다. 확실한 건 아무도 구해내지 못했다는 사실뿐이다. 국민소득 2만 달러니 무역수지 몇 백억 흑자니 하던 요란한 수치와 아울러 생명과 안전에 대한 이 나라의 관심도와 능력치를 참담하게 확인했을 따름이다. 0이었고, 실은 오래도록 0이었다.

0의 반대편에 휘황한 집계들이 있었다. 효율, 합리성, 비용 절감 따위의 그럴싸한 말들이 이 수치들을 찬양했고, 생명과 안전과 상식은 진작부터 내던져진 채 0으로 쪼그라들었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자본의 눈 먼 탐욕이었으니, 참사는 오래전부터 조금씩 진행되었던 셈이다. 선박의 운용 연한을 10년 늘려주고, 이에 수명이 거의 다한 배를 수입하고도 과도한 증축과 개조를 통해 화물과 승객의 적재량을 늘린데다 선장을 비롯 선원 대부분을 비정규직으로 채운 행태는 이번 참극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며 아울러 대한민국 도처에 널린 물욕의 살풍경이었다. 알바생의 장례비를 지급하지 않겠다는 회사나 특정 업체와의 짬짜미로 구조작업 방해를 의심받는 해경, 그 와중에 유족에게 보상금 내역을 전달하라는 국무총리의 지시 따위는 슬프게도, 자본의 아귀가 극악한 이 나라에선 실상 ‘흔한’ 대응이었다.

서서히 드러나는 실소유주 일가의 막대한 부가 온갖 변칙과 편법을 동원해 축적되었고 그 간악함에 치를 떨면서도 정부며 언론 등은 날마다 자행된 불법 행위를 어째서 이제야 추적하는 것인지 의아스럽다. 더불 어 그 간악이 그들만의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제일 힘이 센 자가 제일 돈 많은 자의 죄과를 간단히 사면 시킬 수 있는 나라에서 가치와 미덕 은 전도된 지 오래였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외치던 지난 정부 시절에 선박 규제를 풀어서 참사를 잉태했다는 사실과 사고 몇 주 전에 ‘암 덩어리 규제’를 운운하며 방송 채널을 독점한 이가 지금의 대통령이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일부 위정자의 책임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런 이들에게 기꺼이 한 표를 바치고도 그 앞에서 아이를 살려달라고 무릎 꿇어야 했던 무력한 우리들을 기억 하자는 뜻이다. 지금 이 나라는 딱 그 정도라는 말이다. 힘센 자와 가진 자들이 내세우는 풍요의 숫자가 치 솟을수록 없는 이들의 목숨 값과 안전망은 0으로, 하찮고도 힘없이 추락한다는 사실을 이번 참사는 참혹 하게 증명했다.

울리히 벡의 구분을 빌리자면 세월 호 참사는 ‘예측하지 않은 위험 (danger)’이 아니라‘ 예측할 수  있는, 부정적인 결과를 감수한 위험(risk)’에 의한 것이었다. 안전과 생명의 가치를 내려놓은 자리엔 일상화된 ‘비정상’이 들어섰고, 이를 가능하게한 가장 주된 이유는 돈이었으며 영악한 계산과 일그러진 상식은 이를 용인했다. 우리가 분노해야 할 대상은 무책임한 선장과 부도덕한 기업, 무능한 정부 관료만이 아니다. 무엇보다 경제적 합리의 미명 아래 용인되고 자행되는 숱한 ‘위험’ 과 ‘비정상’들이어야 한다. 극한 위기에 내몰려 절박한 신호를 보내지만 끝내 도움 받지 못하는 이들이 곳곳에서 침몰 중이다. 쌍용과 밀양, 유성기업과 송파구 세 모녀는 세월 호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다. 그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는 이 살인적인 사회와 싸우지 않는한 우리는 모두 세월호에 타고 있는 셈이다‘. 0’ 은 진도 앞바다만의 은유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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