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사고 후 뉴스나 인터넷을 거의 보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두 가지 이유에서였던 것 같다. 우선은, 누구나 그랬겠지만 감정적으로 동요가 너무 심했다. 대학원에 다니며 부업으로 하는 일이, 희생자의 다수인 학생들과 비슷한 연배의 아이들을 만나는 일이라 더욱 그랬다. 그리고 언론의 특성상 정보전달 이면에서 어쩔 수 없이 참사가 가십거리화 되는 것이 불편해서였다. 비극을 타자화 하는 대신 내 몫의 책임을 느끼며 묵묵히 애도하고 기억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의식적인 노력들은 한 순간에, 불시에 무너지곤 했다. 늦은 밤 같은 때 우연히 마주친 미디어 속 현장의 장면들에는 속수무책으로 무장해제 되었다. 넋을 놓고 통곡하 는 가족의 모습, 다리가 풀린 채 빗 속을 하염없이 걷는 어느 유족의 뒷 모습··· . 무엇으로도 언어화될 수 없고 감히 이해할 수도 없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힘이 그 안에 있었다. 이번 사건을 지켜보며 내도록 고민해 왔던 기억한다는 것과 잊는다는 것의 문제가 어쩌면 인식이나 정서, 심지어 감정이입이나 공감마저 넘어선 지대에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참사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나 역시도 외상성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느낀 때였다.

미국의 평론가 캐시 캐루스(Cathy Caruth)는『나의 것이라 주장할 수 없는 경험』(Unclaimed Experience) 이라는 책에서 외상(트라우마)이란 “갑작스러운 재앙의 사건이 환영이나 예기치 못한 현상을 통해 오랜 뒤에 통제되지 않은 채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을 가만 들여다보면 트라우마란 단순히 사건 자체나 사건에 대한 기억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닌 듯싶다. 오히려 사건 이후에야 오는 것, 사건에 대해 잘 알지 못함, 망각에서 기인하는 어떤 것 같다. 온전히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다면 그것은 트라우마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트라우마의 주체는 논리적으로 설명 될 수 없는 환각이나 악몽 등을 언제 나 뒤늦게야, 반복해서 겪는다. 이처럼 트라우마의 시간은 언제나 사후적(事後的)이다. 사건은 경험 후에 점차 망각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망각을 통해서만 비로소 경험된다. 이러한 역설적 구조 때문에 트라우마는 치유한다거나 극복한다는 것이 영영 불가능한지도 모른다.

참사 이후, 가히 전 국민이 겪고 있는 아픔과 참담함은 사실, 기억이나 애도가 결코 손쉬운 것이 아니라는 열패감과 무력감에서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잊을 수도, 그렇다고 기억 할 수도 없다는 딜레마.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트라우마는 역설적으로 죽음이 아니라 생존과 닿게 되는게 아닌가 한다. 간편한 애도나 치유의 차원을 넘어, 고통스럽고 두렵지만 끔찍한 기억의 장을 끊임없이 마주하고 대면함으로써. 기억함으로써 잊기, 잊음으로써 기억하기를 통해서. 이러한 트라우마의 “치유불가능성”에서부터 비로소, 살아남은 자들의 최소한의 윤리가 새로이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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