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전태일 열사 어머니 ‘이소선’ 여사 강연회

  1970년 11월 13일, 22세의 청년 전태일은 평화시장 앞에서 열악한 노동환경을 목놓아 부르짖었다. 하지만 그는 그의 외침이 공허한 메아리가 되자 몸을 불살라 한국사회에 노동문제를 고했다. 꺼져가는 목숨 앞에서도 그는 어머니에게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말아달라”는 당부를 남긴 채 짦은 삶을 마감했다.

 

이소선 여사가 1970년대 당시 상황을 말한다

 

 지난 4일 고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전태일기념사업회 고문) 여사의 강연회가 노동복지회관에서 열렸다. 강연회는 고 전태일 열사의 분신 당시 상황과 노동현실에 대한 내용으로 진행됐다.


  강단에 선 이소선 여사는 “태일이가 원했던 것은 오직 노동자로 사람다운 삶을 살게 해달라는 것이었다”며 당시 열악한 노동환경을 설명했다. 15세 시다공은 주당 약 98시간을 근무 했으며(현재 근로기준법은 주당 40시간으로 제한) 청소년에 대한 고용착취가 비일비재 했다. 열악한 근무환경에 건강검진 역시 형식적인 것에 불과해 폐결핵 등 질병을 앓는 경우도 대부분이었다. 이소선 여사는 “당시 노동조합이 없어 열악한 노동자들의 삶을 대변해 줄 곳이 없었다”며 “노동자를 위한 노조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고 말했다.


  전태일 열사 분신이 사회전반으로 영향을 미쳐 청계피복노동조합을 시작으로 수많은 노동조합이 결성됐지만 실질적인 영향력을 가지지 못해 노동환경은 크게 개선되지 못했다. 이소선 여사는 “노동조합이 만들어졌지만 명목상에 불과했다”며 “노동조합이 노동환경에 대한 목소리를 낼 때 마다 정부와 사업자들은 ‘빨갱이’로 치부하며 노동자들을 억압하는데 급급했다”고 토로했다. 여사는 억압 속에서도 끈질긴 투쟁을 통해 1995년 사회보장기본법제정, 민주화운동 진상규명회·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설립 등에 힘썼지만 아직 해결해야 될 노동문제가 많음을 지적했다.


  이소선 여사는 노동문제해결을 위해 대학생의 관심과 참여를 강조했다. 이소선 여사는 “태일이는 당시 근로기준법을 알고 있는 대학생 친구들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며 “노동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뿐만 아닌 대학생들과 사회 인사들이 하나가 되어야한다”고 역설했다. 황만호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시대가 어려울 때마다 대학생들은 사회에 뛰어들어 문제를 해결하는데 앞장섰다”며 “사회정의를 지키는데 대학생들의 역할이 크다”고 말했다.


  강연회에 참석한 김성우(정치외교 2) 씨는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외면해서는 안된다”며 “노동문제는 대학생들에게 곧 현실이 될 문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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