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업, 취향의 소비 그리고……

아도르노와 비판적 문화이론

아도르노(T. W. Adorno)가 보기에 문화의 의미는 이중적이었다. (1) 일상생활이라는 의미에서의 문화로서 인류학적 의미의 문화가 그것이고, (2) 고급문화로서 엘리트적 의미의 문화가 그것이다. 문화는 이 두 가지 개념 중 하나에 고착되어서는 문화를 온전히 조명할 수 없다. 비판이론가인 아도르노는 이 둘 사이의 지속적 대립관계(부정의 계기)를 설정함으로써 두 개념 사이에 부단한 생산성이라는 운동의 계기를 부여한다. 그것이 아도르노의 비판적 문화이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한편으로는 엘리트적 문화 개념의 비판적 에너지가 인류학적 문화 개념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에 대항하여 정립되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류학적 문화 개념의 진보적인 힘이 엘리트적 문화 개념의 보수적인 성향에 대항해야 한다. 이를 통해 아도르노는 대중문화만을 일방적으로 폄하했다는 오해에서 다소 벗어날 수 있다. 사실 아도르노는, 모든 문화, 그러니까 고급문화든 저급문화든, 야만성의 계기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의 비판은 정확히 야만성을 향해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도르노는 여전히 대중 문화에 냉담했다. 도대체 대중문화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대중문화에서 문화산업으로

아도르노는 대중문화를 문화 산업이라는 말로 대체하는데, 그 이유는 대중 자신들로부터 자발적으로 생겨난 문화라거나, 민중 예술의 현대적 형태라는 식의 해석을 그가 생각하는 대중문화에서 배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문화산업이라는 말이 선택된다. 이렇게 선택된 문화산업은 애초부터 시장에서 소비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 며, 동시에 시장의 논리를 대중에게 새겨 넣어 대중을 유흥을 통해 조작, 관리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심지어 대중들이 이러한 유흥으로서 문화산업에 저항하려고 할 때조차, 그것 역시 문화산업이 노리고 있는 전략에 포함될 정도로 문화산업의 전략은 치밀하다. 예컨대 노이즈 마케팅이 대표적이다. 스스로 이름이 팔려야하는 연예인들이, 스캔들과 루머에 휩싸이면서, "그래도 이렇게라도 이름을 기억해주니 감사하죠.”라고 대답하는 순 간, 그들 역시 스스로 문화산업의 상품으로 전락한다. 이런 문화산업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앞서 언급했다시피 문화산업은 소비를 목적으로 한다. 2) 시장의 소비논리를 문화에 새겨 넣은 결과, 문화산업은 수량화의 법칙을 완벽하게 체현하게 된다. 예컨대 부산의 공무원들이 불꽃축제를 부산을 대표하는 문화행사로 꼽는 경우가 많은데, 정작 불꽃축제가 대표적 문화행사가 된 이유를 물으면 경제적 이익을 산출하는 효과가 크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 기준은 모인 사람들의 수에 성인 5000원 어린이 3000원을 합산하는 것이다. 불꽃축제의 성공 여부는 결국 저 숫자의 크기에 달려있다. 물론 경제유발효과는 검증된 바 없다. 이 수량화를 매개로 문화 분야와 경제 분야는 그 경계선을 잃는다. 아니, 문화가 경제 안으로 허망하게 함몰된다.

3) 문화산업은 판매수익을 위해 생산물을 표준화 또는 규격화해야 한다. 판매를 위해 생산물의 내용과 형식에 획일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화가 흥행하려면 가장 기본적인 코드로 ‘섹스', '폭력’, '해피엔딩’의 무한한 변용이 있어야 한다. 주로 공포영화가 이러한 코드를 잘 따르고 있고, 트랜스포머 같은 영화도 이런 공식을 아주 충실히 따르고 있다. 그리고 한 번 흥행한 영화는 다음번에도 흥행할 수 있는 흥행 보증 수표가 되기 때문에 영화는 시리즈물로, 심지어는 프리퀄의 형태로 시리즈화 된다.

이런 식의 문화산업은 4) 적극적 사유는 거부하지만 유연한 인간을 탄생시킨다. 아도르노는 이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문화산업에서는 …… 적당히 유연한 사람들만이 아직도 여전히 행복을 만들어갈 수 있다. 저항하는 자는 저항을 포기하고, 자신을 어떤 부류에 넣음으로써만 살아남을 수 있다. 문화산업의 분류목록 속에 그러한 이견을 가진 사람도 등록이 되면 그는 토지개혁가가 자본주의에 소속되듯 문화산업에 속하게 된다”『( 계 몽의 변증법』, 1995, 184쪽.)

문화산업이 된 현실, 현실이 된 문화산업

▲ 3D 영화 상영회에서 관객들이 영화를 관람하고 있다. 아도르노는 영화와 같은 문화산업은 대중들에게 무비판적 수용을 강요함으로서 순응하는 인간을 만든다고 보았다(사진=LG전자)

문화산업은 이렇게 순응하는 인간들을 재생산하는, 즉 관리되는 사회의 주요한 수단이 된다. 유산을 상속받을 내 아이를 낳아달 라는 17세기 부르주아 가정의 전통이 여전히 21세기 한국의 TV드라마에서 반복되고 있고, 아이들이 즐기는 오락용 애니메이션의 내용(선 vs 악의 선명한 대립과 멋진 영웅과 못생긴 악당의 대결, 그리고 영웅의 최종 승리)이 성인이 보는 영화의 내용으로 단순 반복되는 상황(트랜스포머와 서구 자동차 문화 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 등은 기어이 현실과 문화산업 사이의 거리를 소멸시키기에 이르 렀다. 예컨대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관음증적 자극이 현실에서 채동욱의 혼외아들 사건으로 변주되고, 천안함 사건은 드라마가 되며, 희생자를 향한 대통령의 추모는 연출 된다. 심지어 뉴스(연합뉴스)의‘ 지상 최대의 구조작전’이라는 표제어는 영화홍보용 선전 문구와 같아진다. 총체적으로 관리되는 사회 속에 사는 대중들은 문화산업의 전략에 걸려 들기만 하면, 산만한 지각을 즐기다가 결국은 퇴행적 감수성을 갖게 되는 대중, 즉 수동적 수용자로 전락하고 만다.

문화비판의 중요성

이러한 대중으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문화 비판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문화를 비판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문화 바깥에서 문화를 보는 사람일까? 문화 안에서 문화를 보는 사람일까? 문화 바깥에서 문화를 본다면, 정작 그는 그 문화 덕분에 사는 사람이라 문화 바깥에 거주한다고 보기 어렵고, 문화 안에서 산다면 그 문화 바깥에서 문화 전체를 보는 데 실패하게 된다. 아도르노는 이 양자 택일에서 벗어나서 둘 사이의 지속적인 운동을 통한 문화 비판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의 이러한 방법론을 “내재적-초월적 비판”이 라 부를 수 있다. 문화산업에 대한 아도르노의 부정적 태도는 결국 문화산업과 진정한 문화 사이의 적대적 대립을 대립물의 영원한 유희라는 주술관계로 구속해버린다. 여기서 대중은 늘 문화산업의 전략에 수동적으로 희생당하거나, 소수의 문화비판가로서 거주지를 분양받을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아도르노의 비관적 계기에 영향을 받았던 하버마스는 스튜어트 홀을 통해 이러한 비관적 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대중은 단순히 문화산업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지만, 그러한 산업적 산물과 협상적이고 절충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으며, 이에 대항하는 입장을 취할 수도 있다. 네그리는 아도르노의 이러한 변증법적 유희를 넘어서 대중들이 생산적인 창조성을 보일 수 있다고 한다. 어쩌면 대중은 문화산업으로 인해 산만한 지각을 가지고, 단순한 유흥을 위해 퇴행적 감수성을 가질 수도 있지만, 동시에 문화산업의 이면을 파헤치고, 문화산업의 정치적 꼼수를 고발하고 비판함으로써 문화산업에 새로운 충격을 가할 줄도 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문화산업의 생산물에 그저 함몰되지 않는 대중들의 비판 적이고 생산적인 역량일 테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만 더 생각하자, 산업이 된 것은 비단 문화만이 아니다. 대학에서 가르쳐지는 그 수많은 과목들은 여전히 학문일까? 상품 일까? 대학은 학문의 전당일까? 공장일까? 그리고 우리는 학생일까? 일꾼일까? 아니면 소비자일까? 이런 생각에 이르면 우리의 ‘비판적 역량’이 그저 문화에만 한정되어서 될 일인가?

▲ 김동규(철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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