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색 배지를 단 청남색 교복과 독 수리가 새겨진 모자, 출석 확인을 받기 위해 손에 들려진 학생증. 우리학교 개교 초창기 학생들의 등교 모습 이었다. 최근에는 흔히‘ 과잠’이라고 불리는 과 잠바가 대학가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지만, 당시 학생들의 필수품은‘ 교복’과‘ 배지’, 그리 고‘ 학생증’이었던 것이다.

‘교복입고’ 등교하는 대학생?

   
1961년 청남색 교복을 입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이다. 교복의 왼쪽 팔 부분에는 학교 로고가 새겨져 있다

 

우리학교에서는 1955학년도 신입 생부터 교복과 교모를 착용하기 시작했다. 지난 1953년 2월 18일에 열 린 전국대학 총학장회의에서 결정된 제모 제복 착용제도를 시행한 것이다. 당시 서구 대신동에 위치했던 캠퍼스가 장전동으로 이전하는 것에 맞춰 교복과 교모가 제정됐다. 남학생은 코르덴(골덴) 소재의 청남색 교복을 입고 독수리가 새겨진 베레모 모양의 모자를 썼다. 여학생은 남학생과 같은 모자를 썼지만 흰색 블라우스와 검은색 치마를 입었다. 김정남(수물학 55, 졸업) 씨는 “지금의 고등학교 교복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단추가 목 끝까지 있었다”고 말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학생이 많던 전후 시절, 대학교 교복은  지식인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김성득(상학 55, 졸업) 씨는“ 교복을 입고 학교 정문을 들어설 때 자긍심으로 허리가 꼿꼿이 세워지곤 했다”고 회상했다.

우리학교 학생들의 자긍심은 배지와 허리띠 버클에서도 찾을 수 있다. 당시 학생들은 어디를 가거나 항상 배지를 달고 다녔다. 교복을 입기 전에도 학교 대표 배지는 제정돼 있어서 학생들은 어디를 가든 배지를 달고 다녔다. 배지는 단과대학마다, 학번마다 다양한 형태를 띠며 변화했다. 김성득 씨는 “배지는 소속 학생들끼리 동질감과 소속감을 느끼게 했다”고 말했다.

학생증 있으면 입대 연기도 가능

          

현재는 체크카드, 교통카드 기능까지 수행하고 있는 학생증은 한국전쟁 때 처음 만들어졌다. 국방부와 문교부에서 전국 남자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전시 학생증을 교부했다. 학생증으로 대학생 신분임을 입증하면 학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입대를 연기해 줬던 것이다. 학생증 뒷면에 날짜를 기록하고 도장을 찍어 출석을 확인하기도 했다. 김성득 씨는“ 옛날에는 출석 확인증을 사고팔기도 했다”며 “국립대학교 학생들은 출석일을 조작할 수 없도록 학생증을 이용했다”고 전했다. 대학생의 사회적 지위가 높았던 시절, 학생증은 대학생의 신분을 증명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진광수(수물학 58, 졸업) 씨는 “학생증을 맡기고 술을 마시거나 가끔 돈을 빌리는 학생들도 있었다”고 기억했다.

학생증은 그 형태가 변화하면서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지만, 교복과 배지는 대학가에서 자취를 감췄다. 1970년대 대학생들이 자율화 풍조를 추구하면서 획일화된 교복을 기피하기 시작한 것이다. 1983년 시행된 중·고등학교 교복 자율화 이후에는 전혀 찾아볼 수 없게 됐다. 한 때 대학생의 필수품이었던 교복과 배지, 이제는 우리학교 기록관에서만 만날 수 있는 역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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