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치 않은 곳에서 평생 끌려 다니는 삶을 산다고 생각해보자. 게오르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25시>에는 파란만장한 삶을 사는 루마니아인 요한 모리츠가 등장한다. 그는 평범한 농부였으나 유태인이라고 상부에 거짓 보고돼 강제 노동에 보내진다. 이후 13여 년 동안 헝가리, 독일, 미국 등으로 옮겨다니며 수용소 생활을 한다. 그야말로 전쟁 통에 인생 전체가 꼬여버린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모리츠가 떠돌아다니는 국가마다 유대인, 적성 루마니아인, 게르만 민족 등 매번 의도하지 않은 다른 국적의 사람으로 대접 받으면서 고난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는 점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모리츠가 웃음도 울음도 아닌 미묘한 표정을 짓는 모습을 보며 필자가 찝찝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때, 선배로부터 소식 하나를 전해 들었다. "우리학교 통폐합된다며?”

필자는 왜 하필 그 시점에 그 문자를 받았을까. 관련 기사를 검색해보니, 대학 특성화 사업 추진에 관한 내용들이 쏟아져 나왔다. 교육부는‘ 지방대학 및 수도권 특성화 사업’의 평가 지표에서 정원감축에 대한 가산점을 부여한다는 충격적인 계획안을 내놓고 있었다. 그때 스쳐간 생각은 우리학교가 마치 <25시> 속 모리츠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 

교육부가 내놓은 계획안 첫머리에는‘ 자율적’이라는 단어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자율은 없다. 특성화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이후 교육부가 정한 주기마다 정해진 정원만큼 인원을 감축하지 못하면 국가장학금 지원이 중단된다. 뿐만 아니라 재정지원 제한 대학으로 선정돼 교육부에서 지원하는 모든 사업의 재정이 끊길 가능성도있다. 이러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구조조정하는 과정에서 기초학문을 다루는 학과는 무너지고, 예술계열 학과는 위축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대학의 자주성을 주장하기는커녕 수많은 구조조정 대상 대학 중 하나가 돼 이리저리 끌려 다닌다. 마치 영화 속에서 모리츠가 한 번도 개인‘ 요한 모리츠’로 대접받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지방대학들은 이미‘ 눈치 보기’에 들어갔다. 더 유리한 점수를 받기 위해, 아니 어쩌면 조금이라도 피해를 덜 보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정원을 감축할지 공개하는 것조차 꺼린다. 우리학교도 예외일 수 없다. 학과의 성격에 대한 고민은 없고, 사업 선정을 위한 통폐합의 칼날을 들이댈 뿐이다. 대학의 미래를 건설하는 현장에 교수와 학생들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고 있다. 도대체 지금 어디에서‘ 부산대학교’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전략’이라는 말을 내세우는 우리학교지만, 영문도 모른 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끌려가는 모리츠가 자꾸 생각나는 것은 필자의 착각일 뿐일까.

영화 속에서 25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25시는 인류의 모든 구제가 끝난 시간이다. 설사 메시아가 다시 강림한다 하더라도 아무런 구제도 할 수 없는 시간이다. 이것은 최후의 시간이 아니라 마지막 시간에서도 한 시간이나 더 지난 시간이다. 이것이 서구사회의 정확한 시간이며, 현재의 시간이란 말이다” 지금 우리는 메시아도 구원할 수 없는 ‘25시’를 살고 있다. 언제쯤 우리가 주인공이었던 24시를 되찾을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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