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새내기들이 들어오는 캠퍼스의 봄은 항상 젊다. 기형적인 고교교육을 끝으로 갑작스럽게 미어터지는 과잉된 활력들이 학내를 가득 채우고, 벚꽃이 만개할 즈음이면 일명 “캠퍼스 커플”인 CC들이 뿜어져 나온다. 그리고 매년 반복되는 이 비희극들은‘ 반복성’이라는 의미에서 공장제적 공정의 쇳소리가 난다. 벚꽃과 쇳소리이라는 기괴한 이 섞임이 3,500원짜리 아메리카노와 함께 카페를 가득 메운 CC들의 얼굴들 사이로 버무려진다.
라깡의 분석처럼 이 기묘한 현상의 뿌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시작된다. 심리학에선 태어난 뒤의 최초의 5~6개월을 자신과 타인에 대한 구분이 없는‘ 공생기’라고 명칭 하는데, 이는 인간의 인지체계 속에 가장 먼저 인입(引入)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바로 부모님이라는 타자라는 말이다. 이는 곧 주체이기 시전에 타자가 먼저 생겨버림을 뜻하고, 주체의 인식은 타자의 존재로 인해 인식되는 차이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말이다. 결국‘ 나’라는 존재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타자가 있어야 한다는 말인 셈이다.
이렇듯 인간은 자기 존재를 확인받기 위해서 끊임없이 타자에게 집착하게 되며, 이는 부모님이나 선생님과 같은 외부적인 명령에 대한 복종을 통한 칭찬유도나 교우관계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나다가 마침내는 타자 의존경향으로 고착화된다. 이런 의미에서 사춘기의 질문인‘ 나는 무엇인가?’란 물음은 타자 없이도 자신의 존재를 규정할 수 있는가에 대한, 즉 진정한 자아에 대한 성찰이라 규정할 수 있겠다.
문제는 기형적 고교교육이 아이들의 사춘기를 학원으로 대체해버렸으며, 아이들의 타자 의존경향은 부모의 시선에서 등수와 소 새끼마냥 찍히는 등급에 몰리는 급우들의 시선이라는 또 다른 타자의 시선으로 교묘히 대체되어버렸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아이들은‘ 나’를 묻는 것이 아닌‘ ~으로서의 나’를 묻는 상황으로 내몰린 채로 꾸역꾸역 대학으로 기어들어온다. 하지만 정작 ‘학벌’이라는 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해줄 것이라 믿었던 대학의‘ 간판’은 대학생들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않는다. 같은 학교 학생들 속에서 학벌이란 건 생각만큼 피부에 와 닿지 않으며, 대학교엔 누군가 지시하는 명령도, 또한 그 명령의 충실한 복종 여부에 따른 칭찬을 해줄 주인도 존재치 않는다. 한마디로, 자신을 확인하기 위한 타자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캠퍼스의 젊음은 정신의 치기 어림이라는 말의 슬픈 동의어로 전락하며, 이 미성숙은 과거 수능등급에 쏟아졌던 타자의 시선을 섭취하고 자라던 과시를 연애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에 대한 과시로의 교묘한 심리적 치환을 시도한다. 이 치환의 순간은 공교육의‘ 공적公的’효력에 의해 공공연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으며, 이 공공연함은 그 공공연함으로 인하여 연애를 남들 다 하는 ‘스펙’이라 부르게 만든다. 기본적으로 자기 존재의 확인이라는 이기적 이유에서 출발한 연애이기에, 이는 모든 스펙이 그러하듯 사랑을 계산의 영역인‘ 썸’ 안으로 몰아넣어 왜곡시키며, 이런 왜곡은 행복해하는 게 아니라 행복해“ 보이려고” 발악하는, 과시로 얼룩진 슬픈 자화상을 거울에 비춰줄 따름이다.
칼바람에 벚꽃은 지고, 대학가는 오늘도 연애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