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 노동을 금지한 조항은 정부의 부당한 규제다, 아이가 벌어오는 작은 돈이라도 있어야 생계가 가능한 가정이 있고 일하고 싶어하는 그들을 고용한 공장주의 행위는 정당한 계약인데 어째서 간섭받아야 하는가. 이는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까지 영국을 비롯한 서양에서 통용되던‘ 상식’이었다. 이제는 폐기된 고전적 시장자유론자의 주장일 뿐일까. 국제노동기구(ILO)는 21세기 현재 아시아나 아프리카 등에서 일하는 아동 노동자의 수를 2억 1천만여 명이라고 발표했으며, 파키스탄을 비롯한 몇몇 지역에선 더 어린 아이들이 더 나쁜 환경에서 일하는 사례가 더 많아졌다고 한다. 이제 어떤 곳에서는 당연한 비상식이 다른 지역에서는 여전히 상식으로 통하는 형국이다. 어설픈 경제사를 펴려는게 아니다. 다만, 규제 철폐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상식은 어디쯤인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거의 모든 방송 채널을 통해 청와대 주재의‘ 규제개혁 점검회의’가 7시간 동안 생중계됐다. 선별된 참석자와‘ 모범 답안’을 준비한 관료, 규제를 두고‘ 쳐부숴야 할 원수’‘, 암 덩어리’라고 일컬은 대통령 사이의‘토론’에 반전은 없었다. 의견 수렴이라는 절차와 경제적 합리라는 외피를 입혔지만 결국 제기된 내용은 한 문장, 어떻든 간에 규제를 완화하겠노라는 집권 정부의 의지였다. 결국 숱한 동어반복의 설왕설래는 최저시급 5,120원을 겨우 받는 대부분의 우리가 아니라 감옥에 앉아서도 연봉 300억원을 너끈히 받는 저들 자본가를 위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장하준은 경제학은 “과학이 아니라 정치적 행위”이며“ 시장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이유를 들어 특정 규제의 도입을 반대한다는 것은, 그 규제를 통해 보호될 권리들을 부정한다는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 표명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러니 그 대대적‘ 정치쇼’는 대선 시절 누누이뇌까리던‘ 맞춤형 복지’와‘ 경제 민주화’를 슬그머니 감춘 이후 이 정권의 가장 확실한‘ 커밍 아웃’이었던 셈이다. 고작 열 살 안팎의 아이를 고용하는 자본가도‘ 일자리 창출’에 앞선 기업가로 둔갑하게 됐다면 과장이겠지만, 특혜 시비를 불사하고 공공성 훼손에 아랑곳 없이 규제를 들어내버린 근래 일련의 사례들에 대자면 그 과장에도 얼마간의 진실이 담겨있는 게 아닌지.

시장과 경제가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사회일수록 그 물적 성취가 성원 전체에게 돌아가지 않고 일부에 편중된다는 사실은 이제 거의 자명해진‘ 경험칙’이다. 환경과 의료와 안전과 교육과 사회적 약자 보호 등 우리가 전력을 다해 지키고 가꿔야 할 공공성에 대한 규제를 걷어내는 일이‘ 혁신’이 되는 사회는 경제라는 미명 아래 아동 인권을 내치는 나라의‘ 상식’에서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애초부터“ 노동자들을 위한 안전 규제가 없었던 탐욕의 제국”(황윤)이었다는 진단과“ 이제 기득권자들은 거칠 것 없는 핏빛 자유를 구가할 수 있게 된 것”(강신주)이라는 예측이 나오는 와중에도 통수권자의 주문에 가장 기민하게 반응한 곳이 환경부였다는 사실은 차라리 허탈할 따름이다. 기본 소득에 한번, 기업 내 임금 격차를 12배 이내로 제한하는 방안에 또 한 번 국민투표를 실시했다는 알프스 자락의 어떤 나라와 7시간 동안 방송 채널을 독점하고도 기껏해야‘ 푸드트럭’을 떠벌리는 나라의 시차는 대체 어느 정도인가. 눈 먼 경제논리를 경계할 일이다. 암덩어리라니. 상식이 된 우리의 권리가 벼랑 끝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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