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이 묻은 초록색 블라우스를 깨끗하게 빨았다. 요즘 “자기 것은 자기가 빨아라”는 엄마의 선언 때문에 내가 빨래를 한다. 예전에는 내가 빨래를 하지 않았는데도 산더미 같이 쌓인 옷가지들을 보면 한숨부터 나왔는데, 이제는 슬슬 빨래가 재밌어지려한다. 할 일을 다 하지 않았다는 후회처럼 묻어있는 얼룩들이나, 더운 강의실에서 공부하느라 옷에 배인 땀 냄새들을 비비고 주무르고 문지르다보면 어느새 깨끗해져 있는 옷처럼 내 마음도 깨끗해진다.
 
   뮤지컬 ‘빨래’도 이 같은 맥락에 있다. 돈도 없고 배경도 없고, 가진 것보다 못 가진 것이 더 많은 사람들이지만, 결핍된 만큼 깨끗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뮤지컬 ‘빨래’는 강원도에서 올라온 서울살이 5년차 아가씨 나영의 “서울 참 못 됐죠”라는 대사로 시작된다. 나영은 부당해고 당한 동료를 위해 항변하다 파주 창고 정리직으로 이직 당한다. 나영은 속상한 마음에 술을 마시고 늦게 귀가하다 위험에 처하고 이때 솔롱고는 외국인 노동자라는 온갖 모욕과 학대를 당해가면서도 나영을 지키기 위해 힘쓴다. 그런 모습을 보며 나영은 조금씩 솔롱고에게 사랑을 느낀다.
 
  나영의 주인집 할머니는 장애인 딸을 방 안에 숨겨두고 살고, 이웃집에 사는 희정 엄마는 ‘자식 버리고 동대문에서 옷 장사를 한다’고 말한다. 나영과 할머니, 희정 엄마는 빨래를 하며 삶의 애환을 훌훌 털어버리고 한층 더 가까워진다. 봄이 되고 나영은 솔롱고와의 희망찬 새 출발을 위해 그의 옥탑방으로 이사를 간다.
 
  이처럼 세상에서 영향력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뮤지컬 ‘빨래’는 소리 없이 우리 사회의 문제를 고발하고 있다. 갖은 모욕을 당하면서도 월급을 받지 못한 솔롱고와 마이클, 이웃에 주인집 할머니의 장애인 딸이 살고 있다는 것도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된 나영. 바른말하는 서점 직원을 해고하는 제일 서점 사장 빵과 그런 사장에게 부당해고라고 항변하다 창고 정리직으로 이직당하는 나영을 볼 때, 이것이 더 이상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특히 겉으로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을 존중해야한다고 말하지만, 지하철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보면 옆에 앉길 꺼리던 나의 이중성을 반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빨래를 보기 직전까지만 해도 외국인 노동자와 한국 소녀와의 사랑이야기는 나에게 매우 낯설었다. 그러나 빨래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나는 어느새 나영과 솔롱고의 사랑에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솔롱고의 노래에 녹은 내 마음처럼, 외국인 노동자를 향해있던 보이지 않는 벽도 스르르 녹아버리는 느낌이었다.
 
  밀린 방값이 월급보다 많아도, 매일 저녁 애인과 싸움에 울어도, 억척스럽게 아끼며 슬픔을 가슴에 묻어도 여전히 희망을 가지고 내일을 살아가는 그들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주먹이 쥐어졌다. 결국 사랑을 찾는 나영과 솔롱고처럼, 장애를 가진 딸의 기저귀를 빨랫줄에 너는 것이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웃어넘기는 주인집 할머니처럼, 우리도 먼지 같은 얼룩 같은 어제를 지우고, 먼지 같은 오늘을 털고 주름진 내일을 다려, 잘 다려진 내일을 입고 오늘을 힘차게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저작권자 © 채널PNU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