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한준희 KBS 축구 해설위원

   
▲ 한준희 KBS 축구 해설위원

한준희 위원은 인터뷰 내내 헛기침을 하며 음료를 들이켰다. “오늘 목상태가 굉장히 좋지 않아요” 모 프로그램에서‘ 목 건강 위험도 1위’를 기록한 이력이 있는 한 위원은 일주일에 10개 이상의 프로그램을 소화하고 있다. 바쁜 스케줄에 진료를 미루다가 치아 13개를 치료했다던가, 단순 아토피로 생각해 방치하다가 후에 대상포진임을 알았다던가. 건강을 챙길 시간도 없이 일에 매진하고 있다. 약속시간보다 30분 늦게 도착한 한 위원. KBS 본사 신관 로비에서 마주한 그는 인터뷰가 끝나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말을 쏟아냈다.

축구,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

축구팬들 사이에서‘ 최고의 해설가’로 인정받고 있음에도 그의 공부는 끝이 없다, 경기를 분석하다 보면 A4용지가 집 안을 하얗게 뒤덮는다. 하나의 경기도 눈에 불을 켜고 분석해가며 봐야하는 한 위원에게“ 축구가 질릴 만도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졌더니 이내 고개를 저으며 답을 건네 왔다.“ 힘들다는 거지, 축구를 덜 좋아하게 된 것은 아니죠‘. 축구를 좋아해야함’으로 인해 좋아하는 것이 조금 고통스러울 뿐이에요”

한준희 위원이 축구를 좋아하게 된 것은 어쩌면 필연적일 수도 있다. 그의 축구 사랑은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릴 적부터 시작됐다. 그 시절 아이들에게 축구는 유일한‘ 놀이’였다“. 얼마나 보편적인 스포츠에요. 공 하나만 있어도 골대 대충 정해놓고 할 수 있는데. 1:1, 5:5, 심지어는 35:35까지. 인원도 상관없잖아요” 이런 사정에 축구경기도 자연스레 시청하게 됐다. 한 위원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차범근 전 선수가 해트트릭을 기록한 1976년 대통령배 국제 축구대회 경기.“ 그 경기를 보고‘ 오! 이제부터 축구를 좋아해야지’라는 것은 아니었지. 그 이전은 기억이 나지 않을 뿐이에요”

청소년 시절에도 그의 주변은 ‘축구 투성이’였다. 당대 명문이었던 동북중학교와 중동중학교를 모두 거친 한준희 위원. 그가 졸업한 현대고등학교 역시 축구로 유명했다“. 주위에 축구부 친구들도 많았고, 축구 얘기를 나누는 것이 일상이었어요” 한 위원에게 축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대학시절은 평범(?)했다. 서울대학교 해양학과 졸업 후 과학철학 관련 석사 과정을 졸업했다.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까지 했다. 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것. 순리대로라면 대학 강단에서 떠들고 있어야 할 사람이 지금은 마이크 앞에서 축구를 중계하고 있다. 2001년 해외축구 커뮤니티‘ 사커라인’에 칼럼을 게재하기 시작한 한 위원. 2002년 한·일 월드컵과 맞물려 커뮤니티 회원 수는 급증했고, MBC 지상파의 눈에 띄어 축구 해설을 제의받게 됐다.“ 마침 공부가 하기 싫어지고 있었죠(웃음). 축구에 관련된 일을 하게 된 그 선택은 전혀 후회하지 않아요”

'비선수출신' 해설가 한준희

한준희 위원이 해설가로 데뷔할 당시‘ 비선수출신’ 해설가는 드물었다. 선수출신 해설가들이 대부분의 중계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지금은 오히려 비선수출신 해설가가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이는 한 위원을 포함한 초창기 비선수출신 해설가들의 활약 덕분이다. 이들의 훌륭한 해설은, 선수경험이 없어 제대로 된 해설을 하지못할 것이라는 편견을 깨버렸다.

△1세대 비선수출신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며 이름을 알린 것으로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서형욱 해설위원, 박문성 해설위원 등을 최초로 알고 있다. 물론 1세대라 할 수있지만,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75년부터 활동한 이의재 전 해설위원은‘ 0세대’ 비선수출신 해설위원이다. 나도 이분의 해설을 들으며 자랐다.

△한 위원의 롤모델인가?

물론 존경하지만 롤모델은 따로 있다. 바로 故 주영광 전 해설위원이다. 이분이 해설하는 대한민국 최초의 해외축구방송을 시청할 수 있었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해외축구에 대한 정보를 얻기 힘든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주영광 전 해설위원은 모든 선수들의 성향을 정확히 파악해 해설했다. 자신의 관찰과 직감에 의존해야 했던 당시에 그런 해설을 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축구 해설위원에 대한 직업정신이 확고한 것 같다. 한준희만의 직업철학도 존재할 것 같은데

‘무엇을 해야 한다’보다‘ 무엇을 하면 안 된다’에 초점을 맞춘다. 연애할 때에도 그렇지 않나. 남자는 여자가 무엇을 좋아하나 생각해선 안 된다. 무엇을 싫어하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해설도 마찬가지다. 방송의 주인은 시청자다. 자기중심적 해설은 지양해야 한다.

또 경기에 따라 차별을 두는 것도 싫어한다. 최근에는 해설을 예능처럼 생각해‘ 어록’을 남기려는 해설가들도 종종 있다. 이런 부류는 해설위원의 자격이 없다. 축구는 90분 내내 성실하게 해설해야 한다. 이러한 원칙들을 모두 성실히 지키는 것이 이용수 해설위원이다. 그래서 내가 존경하지.

△국제대회마다 팬들의 원성이 잦다.‘ 선수출신 이용수 해설위원보다 해설 잘하는 한준희 해설위원을 써라’라는

당연히 이용수 해설위원이 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우리나라 경기는 비선수출신이 해설해서는 안 된다. 최소한 국가대표라도 해본 사람이 해야 한다. 비선수출신이 전달할 수 있는 내용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나라의 경기는 우리 중심으로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때 선수출신 해설위원들의 장점이 나오는 것이다. 선수생활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우리 선수들의 입장을 해설할 수있겠는가. 그런 원성을 보내는 팬들에게는 항상 감사하지만, 비선수출신 해설위원은 국제대회에 적합하지 않다.

△최근에는 선수출신보다 비선수 출신 해설위원의 비중이 훨씬 많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시간이 갈수록 선수출신 해설위원이 늘어날 것이다. 그게 당연하다. 내가 해설위원을 처음 맡을 당시에는 해외축구를 보는 사람 자체가 드물었다. 지금은 아니다. 요즘은 초등학생도 유럽축구를 꿰고있다. 이런 애들이 선수를 거쳐 해설위원이 되면 비선수출신은 짐싸야한다. 입지가 줄어들 것이다.

나도 축구를 몸소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다. 철학을 전공했었는데, 이를 말하면 다른 사람들은 꼭 칸트를 언급한다. 칸트는 철학의 아주 일부일 뿐인데 왜 모르냐고 따지면 짜증이 날 정도다. 축구해설도 마찬가지다. 그라운드에서 땀을 흘린 선수들과는 아예 출발점부터가 다르다. 메워질 수 없는 간극이다.

△비선수출신의 한계를 몸소 겪었다. 이를 극복할 방법은 없나? 감수해야 하는지

아마추어 축구방송이 가장 많은 KBS에 속해있는 것이 행운이다. 자연스레 아마추어 축구를 가장 많이 중계한 해설위원이 됐다. 현장 축구와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프로리그는 관성적으로 공부할 수밖에 없다. 모두가 아는 사실, 모두가 아는 선수. 그런데 전혀 모르는 분야에 대해 공부를 하게 되면 내공이 쌓일 수밖에 없다. 현장 인력들과 교류도 잦아졌고, 정보가 없는 경기에 대한 해설요령도 익힐 수 있어 도움이 됐다.

△‘축구 해설’이라는 일에 굉장히 보람을 느끼는 것 같다. 축구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한 위원처럼 축구에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하는데

힘들 것이다. 이전처럼 축구를 즐길 수 없게 된다. 보고 싶은 경기를 볼 수 없게 된다. 제약이 많이 따르게 된다. 해설가는 실체가 없다. 시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공채도 없다. 선수생활을 했던 이들도 해설을 맡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인데, 비선수는 오죽하겠나. 기자도 마찬가지. 요즘같이‘ 속보’가 중요한 시대에, 기자들이 축구 즐길 시간이 어디 있겠나. 경기 보는 내내 기사를 써야 한다. 현실적인 어려움도 많다.

△그래도 축구팬의 입장에서 관련된 일을 한다면 즐거울 것 같다. 혹시 해설을 하며 재밌는 에피소드는 없었나

내가 직접 겪은 일은 아니지만, 들은 얘기가 있다. 앞서 말했듯이 70, 80년대에는 해외축구에 대한 정보를 얻기 힘들었다. 현지 화면과 자막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 근데 화면 상태마저 좋지 않아 자막을 읽을 수 없을 때가 많았다. 모르는 얼굴의 선수가 나오면 당황할 수밖에. 그때 순간적으로 선수 이름을 멋대로 부르기 시작한다. 그럴듯한 이름을 막 갖다 붙이는 거야. 알아차릴 사람도 거의 없었고, 있더라도 항의할 수단이 없으니까. 이름을 아는 선수가 손에 꼽을 정도니, 의도치 않게 가명을 갖게 된 선수가 많았을 것이다(웃음).

‘정치적 관음증 환자’와 축구

확고한 축구 철학을 가진 한 위원과 얘기를 나누다보니 문득 궁금한 점이 생겼다. 한준희는‘ 축구’를 어떻게 생각할까? 100년이 넘는 긴 축구역사 속에서 정치는 빠질 수 없는 요소다. 이탈리아의 철학자 움베르트 에코는 스포츠 관람자를 ‘관음증 환자’에 비유했다. 축구를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는 이들도 ‘관음증 환자’일까? 한준희 위원은‘ 축구는 그 속성상 정치적인 것이 배제되기 어려운 스포츠’라고 설명한다.

"축구는 정치적 성격을 필 수밖에 없어요. 축구를 하는 나라가 워낙 많잖아요? 그만큼 보편화된 스포츠죠. 국가대항전을 치른다 하면 대부분의 나라가 할 수 있는 것이 축구밖에 없어요. 전 세계인들의 응원전이 되는 거죠. 그러다보니 역사적으로 정치에 가장 많이 활용된 종목일 수밖에 없죠. 제2회 월드컵을 봐요. 무솔리니 시절에 이탈리아에서 월드컵을 개최했고, 또 우승을 차지했죠. 사실 그때는 오스트리아가 세계 최고였는데.

<영광의 탈출>이라는 영화 아세요? 세계2차대전 당시 축구선수들이 나치에 대항해 입대하는데, 결국 포로로 잡혀요. 그런데 나치에서는 사기 진작을 위해 자기네 국가대표랑 포로연합팀을 나눠 경기를 붙인 거에요. 자기 민족의 우수성을 축구를 통해 드려내려고 한거지. 편파판정을 하든 격렬한 반칙으로 하든, 모두 축구로 표출하려 한거죠,

유럽 축구리그의 유명한 더비관계들도 마찬가지에요. 바이에른 뮌휀과 함부르크는, 예전 같으면 아예 다른 나라죠. 리버풀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더비,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더비도 똑같아요. 정치적인 문제가 얽혀있는 거지.

마라도나가 손으로 골을 넣은 ‘신의 손’ 사건도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전쟁 직후의 일이잖아요? 옛날 같았으면 칼 들고 싸우던 걸 이제는 축구공으로 싸우는 거죠. 전세계가 열광하는 가장 보편적인 스포츠가 축구다 보니 감정대립과 싸움은 있을 수 밖에. 결국 축구는 그 속성상 정치적인 것이 배제되기 어려워요.

여담이긴 한데, 우리나라 축구가 발전하기 어려웠던 이유도 같은 맥락이에요. 봉건역사가 별로 없어서 그래요. 다 중앙집권이야. 우리나라는 지역별로 원수질 일이 별로 없고, 연고 자체가 소도시 중심이어서 더욱 그렇죠. 싸울 일이 없어요. 야구는 그 기반이 있잖아요? 경남고, 경북고, 광주일고 같은. 지역 명문 고등학교가다 야구를 하죠. 그러니까 결집이되고, 광역을 대표할만한 독보적인 학원시스템이 있었던 거죠. 우리나라 축구는 그게 안돼"

   
▲ 한준희 KBS 축구 해설위원

“어떤 교양과목에 흥미를 느껴서 해당 학과 전공 수업을 들어요. 그러면 이게 또 재미없어진다니까” 한준희 위원은 축구를 좋아하는 것이 ‘힘들어졌다’고 말한다. 그럴 만하다. 한 경기를 해설하기 위해 중계를 맡지 않은 경기들도 챙겨봐야 한다. 시차가 큰 국내축구와 해외축구를 모두 챙겨보려니 잠을 잘 시간도 없다. “취미로 볼 때는 즐겼는데, 이제는 그게 잘 안돼요” 그는 헛기침을 하는 와중에도 말을 끝맺지 않았다.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쉴 새 없이 축구얘기를 쏟아냈다. 밤을 샐 기세로 얘기하는 한 위원. 그의 목상태가 걱정된 기자는 인터뷰를 마무리 지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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