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시원(일반사회교육) 교수

정당성 있는 권력과 정당성 없는 권력은 그 권력이 정의로운지 정의롭지 못한지에 따라 결정된다. 그렇다면 정당성은 어떻게 획득되는 것일까? 정치학자 비덤(David Beetham)은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첫째, 권력은 반드시 권력자의 자의적인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공식적인 법과 규칙에 따라 행사되어야 한다. 둘째, 확립된 규칙은 치자와 피치자가 그것에 대해 신뢰와 신념을 공유해야 한다. 셋째, 정당성은 피치자가‘ 동의’를 표명함으로써 확보돼야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정당성의 기준을 높게 잡으면 제대로 된 권력을 행사하는 정권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당성의 기준을 완화하여 두 가지로 제시한 주장도 존재한다. 첫째, 정당성의 객관적 기준을‘ 헌법’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둘째, 정당성의 기초를 정규적이고 경쟁적인 선거를 통한 시민 다수의 지지에서 찾는 것이다.

정당성의 근거를 이처럼 헌법이나 선거에서의 다수 지지 등에서 찾는 방식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정당성을 설명하는 데 특히 유용하다. 하지만 여기에서 고려해야 할 점이 두 가지 있다. 첫째, 헌법을 준수했다고 해서 권력의 정당성이 바로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헌법이 피치자로부터 신뢰받지 못한다면 아무리 헌법을 준수했다 하더라도 그 권력이 정당하고 정의로운 것이라고 인정받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예컨대, 독재자가 자의적으로 개정한 헌법은 정당성의 기초가 될수 없다. 정당성은 법에 일치하는 성질을 의미하는 합법성도 지녀야 하지만 그 법이 정당하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면 합법성을 지녔다 하더라도 정당성을 획득했다고 하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둘째, 선거를 통해 다수를 확보했다 하더라도 투표율이 상당히 낮다면, 그리고 선거가 공정하지 못했다면 권력은 정당성을 확보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만약 선거가 공정하지 못했다면 그 선거에서 이겨 권력을 획득했다 하더라도 그 권력은 전혀 정의로운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2012년 18대 대선에서 발생한 국가기관의 선거개입 문제는 그냥 넘어가선 안 될 문제이다. 대의제 국가에서 선거는 주권을 지닌 국민들이 자신의 대리인을 선출하는 제도이다. 그런데 18대 대선에 국정원과 군사이버사령부가 선거에 개입한 사건이 발생했다. 국민들의 주권 행사인 선거를 국가기관이 개입하여 결과를 왜곡하고자 한 것이다. 국가기관의 선거개입은 민주주의 원리와 제도에 대한 파괴행위이자 헌법정신을 침해한 명백한 국헌문란 행위이다.

그런데 국정원 불법 대선개입 사건을 축소·은폐한 혐의로 기소된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은 1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불법 대선개입이 의혹인지 진실인지는 역사와 양심세력이 밝혀주겠지만 이 상황에서 확실한게 있다. 국가기관이 대선에 개입했고 그걸 밝히려던 검찰 공무원들이 자리에서 밀려났다는 점에서 누군가가 이 사실을 은폐·축소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권력은 권위도 정당성도 상실했으며 이제 남은 것은 대선에서 이긴 절차적 합법성밖에 없다. 그런데 절차적 합법성마저 부정선거로 무너지면 이 정권은 권위도, 합법성도, 정당성도 상실한 벌거숭이 권력이 된다. 그러니 정의롭지 못한 합법성이라도 사수하기 위해 부정의(injustice)라도 동원하겠다는 현 정권의 의지가 김용판 무죄판결로 드러난 것이다.

지금 권력에 대한 국민들의 자발적인 동의와 복종은 이미 상당부분 고갈되었다. 이 권력이 훼손된 권위를 다시 세우고 정당성을 회복하는 방안은 명확한 진실 규명과 책임자 처벌에서 시작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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