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법의학자 문국진

"아마 60년대 일로 기억해요. 한강에 나룻배가 다니던 시절이었디. 야간학교에 다니며 공부하던 한 여학생이 있었는데, 밤늦게 마지막 나룻배를 타고 돌아오면 어머니가 데불고 집에 돌아오곤 했어요. 주변에는 50명가량의 인부들이 블록을 찍어내는 일을 하고 있어 위험했거든. 그런데 하루는 아무리 기다려도 딸이 돌아오지 않는 거야. 당시 통행금지 시간이 있었으니까 어머니가 기다리다 못해 집에 돌아갔는데, 다음날 모래사장에 딸이 시체로 발견이 된거요. 부검을 하니까 턱과 유방, 대음순(여자 성기의 일부분)에 치흔이 있더만요. 경찰들은 인부들 가운데 범인이 있다고 생각해서 수사를 하게 됐는데, 치흔을 캐스팅해서 인부들의 치아와 비교해보니 맞는 사람이 없어. 그런데 이상한 건 치흔이 너무나 뚜렷하게 남았다는 거요. 보통 사람이 누구한테 물리면, 피하게 되니 피한 흔적이 남기 마련인데, 그것도 없이 치흔만 뚜렷하게 나타난거디. 그러니까 옳거니, 이미 죽은 뒤에 물렸다는 거요. 그렇게 성범죄로 인한 죽음으로 가장됐던 게 드러났어요. 수사 대상을 바꿔 여학생의 주변인물을 조사하기 시작했디. 알고 보니 여학생 남편의 치흔과 딱 들어맞았어. 아직도 그때 일은 생생히 기억나”

아흔을 바라보는 어느 노학자가 흥분된 목소리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호는 도상. 필명은 유포. 국립과학수사연구소(현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창립 멤버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법의학자인 문국진 선생의 사건현장 이야기다. 그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뿐 아니라 법의학교실, 법의학회를 처음 만들었고, 법의학의 불모지였던 우리나라에서 꿋꿋이 한길을 걸었다. 여의도의 어느 조용한 빌딩에 위치한 그의 자택에서, 그의 인생과 법의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평양 출신답게 유장하게 구사하는 평안도 사투리는 그의 우직한 품성을 드러내는 듯 했다. 인터뷰 내내 그의 눈빛은 나이를 잊은 듯, 법의학에 대한 열정으로 출렁였다.

△법의학을 ‘인간의 권리를 다루는 의학’이라고 정의내리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의학자는 병을 치료하고, 환자를 살리디요. 물론 생명도 중요하지만 또 하나 중요한 것이 바로 권리에요. 의학이 생명을 다룬다면, 법의학은 생명보다 사람이 갖고 있는 권리를 우선시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전까지 사람들에게 ‘당신에게 무엇이 제일 중요하냐’고 물으면 “목숨만 살려주면 무슨 일이든 하겠소”라는 대답을 했디요. 그런데 문화인에게 똑같이 물어보면 “내 목숨보다 권리가 더 소중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나라에 나타나는 사회현상이에요. 문화가 발달될수록 권리의식이 향상되요. 즉,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거디.

△법의학자가 어떤 일을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과거에는 용의자가 잡히면 경찰들이 문초하고 심지어 고문까지 해가며 자백을 받아냈어요. 그 사람의 권리가 완전히 침해되고 마는 거디. 법의학은 범죄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을 하는 역할을 해요. 각종 증거물을 찾아내고, 부검을 시행해 정확한 사인을 밝히는 거요. 흔히 말하는 과학수사의 기반이 법의학이에요. 특히 형사적으로 법의학이 많이 다뤄지는데, 근래에는 교통사고처럼 정확한 근거에 의해 손해를 판단해야 할 때 중요한 지표가 되기도 해요.

△하루가 머다 하고 시체를 접하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는 없나요

그런 질문 참 많이 받는데, 사람들은 시체니까 무섭고 더럽고, 뭔가 위압감을 느낀다고들 하디요. 그러나 법의학자는 진실만을 파헤치려고 하기 때문에, 시체의 존재 자체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요. 그저 부검을 통해 사인을 파악하고 진실을 알아낼 뿐이요.


학창 시절에 대해 질문하자, 의외에 단어들이 등장한다. 문 선생은 의과대학 배구팀 대표선수로 활동할 정도로 운동을 즐겼고, 당시 자치단체였던 학도호국단의 간부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랬던 그에게 법의학은 마치 ‘운명’처럼 다가왔다.

△법의학을 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학부 3학년 때였어요. 날씨가 좋아서 외출했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는 거요. 비를 피하려고 들어간 곳이 헌책방이었어요. 여러 가지 책이 있었는데, 거기 일본 교수가 쓴 ‘법의학’이라는 책이 있었어. ‘사람에게 생명도 중요하지만 권리가 중요하다. 이를 다루는 것이 법의학이다’라는 구절을 읽는데 고만 정신이 바짝 들더라고. 그 책의 저자에게 법의학을 배워야겠다는 결심을 하게됐디요. 당시 국교가 없어 홍콩에 있는 친구를 통해 편지를 주고받았을 정도로 열정적이었어요. 국교가 이뤄진 이후 1964년에 찾아가 그분의 연구를 도왔디. 또 그 분의 제자인 우에노 교수를 만나 그 분에게서도 많은 법의학적 지식을 배우고, 새로운 유형의 혈액형인 Cl혈액형을 발견하기도 했어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나요

스승인 장기려 선생께서 졸업 후 무엇을 할건지 물었을 때 “법의학을 하겠다”고 말하니 “미친놈, 법의학은 학문도 아니야”라는 대답이 돌아왔어요.(웃음) 그래도 고집을 꺾지 않았지요. 하지만 몇 년이 지나니 포기하고 싶은 때가 많아지는 거요. 우리나라에는 부검하는 것이 ‘두벌죽음(두 번 죽임)’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했거든. 부검을 시도하다 사망자 아버지에게 도끼로 맞아 죽을 뻔 한 적도 있어요. 그런 일까지 겪고 나니 도저히 못하겠더라고. 선생님께 돌아와 잘못을 빌었는데, ‘한 우물을 파라’며 끝끝내 받아주시지 않았디요. 눈물을 참으면 돌아섰는데, 그때 선생님께서 받아주셨으면, 지금의 나도 없겠다는 생각을 해요.

또 하나 법의학 공부를 계속해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있어요. 4.19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중앙청(현 청와대) 안에 있었어요. 경찰과 학생들이 대치하는 모습이 다 보였디. 기관총을 난사하니까 의대생들 가운에 새빨간 피가 묻어나왔어요. 그 모습을 보고 화가 난 사람들이 총알이 날아오는데도 그냥 막 돌진을 하더라고. 그 모습을 보면서 무고한 죽음에는 누구보다 용감히 맞서는 기질을 갖고 있는 것이 우리 국민인 것을 깨달았어요. 이 사람들에게 법의학을 잘 전파하면 어느 나라보다 억울한 죽음에 용감하게 맞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디.


문 선생은 사인규명을 위한 우리나라의 검시체제가 아직 원시적인 수준에 머물러있다고 지적했다. 각 나라는 국민의 정서에 맞게 나름의 검시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특히 미국을 위시한 몇몇 나라들은 ‘M.E.(Medical Examiner)’를 두는데, 이들은 모든 국민을대상으로 죽음을 돌보는 전문적인 검시관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 인식 부족으로 오랜기간 과거 일제시대의 관행을 답습하고 있는 우리나라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우리나라 검시제도에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점이 있나요

영미권 국가에서는 사망자가 발생했을 때 M.E.가 출동해 M.E.라인을 치고 현장과 시신의 상태를 파악해요. 그 나라 대통령이 와도 M.E. 라인은 넘지 못하고 돌아가야 할 정도의 권한을 주는 거요. 법의학이 국가제도 하에 독립적으로 실시되고 있고, 국민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고 있디. 그런데 우리나라와는 너무 먼 얘기야. 우리나라에선 사건이 발생하면 경찰이 출동하지요. 현장을 살피고는 의사를 데려와서 사망자의 사인을 물어요. 의사가 겉모습만 보고 알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부검을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검시 책임자가 검사에요. 의사가 사인을 알 수 없다는 보고서를 내면, 검사가 부검을 허락하는 보고서를 도장에 찍어요. 다음은 판사에게 시신을 압수해달라고 요청해야 되요. 시신 압수영장을 발부하면, 그제야 경찰이 전문가에게 부검을 요청하게 되는 거요. 원시적이어도 이렇게 원시적인 체계가 없는거디. 부검하기까지 적어도 삼일이 걸려요. 여름날이면 이미 시체는 썩어버리고 부검도 불가능해요.

현역 교수로 있을 때 M.E.제도를 만들기 위해 탄원서도 쓰고 요청도 해봤지만,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어. M.E.제도를 자신들의 권리를 빼앗는 것으로 인식하는 검찰들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 한 만들어지기는 힘들듯해요.

△각 대학의 법의학 교육은 어떻게 이뤄지고 있나요

대학을 다닐 때만 해도 각 의과대학에 법의학 교실이 다 있었어요. 일본 법의학교실의 모습을 모방했던 거디. 이후엔 점차 우리나라가 미국식 교육을 시행하게 됐단 말입니다. 그런데 미국은 법의학교실 없이 국가기관으로 법의기관을 두고 있는 나라에요.

우리나라에서 미국식 의학교육을 배우기 위해 시찰단을 보냈는데, 아, 미국 대학에는 법의학교실도 없고, 강의도 안하거든. 그러니까 돌아와서 일본 사람들이 만들었던 법의학 교실을 다 없애버린 거야. 의과대학 졸업했지만, 법의학적인 지식이 없는 상태인 학자들이 사망진단서를 쓰니까 사회적인 문제가 일어나기도 했어요. 법의학교실이 만들어지기 전엔 더 심각했디. 현재는 전국 45개 의과대학 중 13곳에만 법의학 교실이 있어요. 모든 대학에 정착하려면 더 오랜 시일이 걸릴 거라 예상하고 있어요.

△지난 2011년 법의학 드라마 <싸인> 방영 이후 법의학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높아진 것 같습니다

당시 사방에서 <싸인>에 대한 문의전화가 왔어요. 실제로 있을 수 없는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많았지만, 법의관이 자신의 생명을 내놓으면서 진실을 밝히는 결말만은 매우 마음에 들더라고. 그런데 그 해에 학회 특강자리에서 깜짝 놀랐어요. 항상 정원을 채우지 못하던 국립과학수사원에 다섯 명의 여의사가 법의관으로 들어온 거야. 알고 보니 드라마의 영향이 컸더라고. 책 백 권을 내는 것보다 드라마 한편이 더 효과가 좋다는 것을 알았디(웃음). 법의학의 대중화에 기여한다면, 이러한 드라마를 만드는 것에 대찬성이에요.

정년퇴임이 그의 도전을 멈출 순 없었다. 평생을 일구어온 법의학을 토대로 다른 분야와의 접목을 시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저서 <모차르트의 귀>, <반 고흐, 죽음의 비밀>을 통해 다양한 예술가들의 사인을 밝혔다. 뿐만 아니라 국내 법의학이야기의 효시라 불리는 베스트셀러 <새튼이>와 <지상아>는 현재도 많은 독자들이 찾고 있고, 지난 2011년 <지상아와 새튼이>로 재편집되기도 했다. 현재도 대중들에게 인정받는 법의학을 만들기 위해 집필 작업을 하고 있다.

△법의학과 예술의 만남을 추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람을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하는 법의학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문화가 발달 돼야 할 수 있는 것이지, 야만 국가에서는 생각도 못해요. 그런데 문화의 중심은 예술이거든. 예술가들의 죽음을 살펴보니, 사인이 나흘 꼴로 바뀌더라고. 법의학자들은 왜 유명한 예술가들의 사인에 대해 파헤치지 않았는지 의문이 들었어요. 바로 잡아줘야 한다고 생각해서 손을 대게 됐디. 증거물이 없고, 시체도 없으니 법의학자들도 손을 떼고 있지만, 작품과 문건만 있으면 얼마든지 사인을 파악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물론, 시일이 걸리고 예술에 대한 공부가 많이 필요하디요.

최근에는 예술가들의 죽음을 밝히는 근거가 되는 ‘법의탐정론’이라는 것을 제창했어요. 요즘은 집에서 고걸 공부한다고 세상 돌아가는 일을 몰라요.(웃음)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20대에 ‘하다보면 되겠지’라는 태도는 버려야 해요. 그 시기에 적어도 자신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구분할 수 있잖아요? 좋아하는 것을 빨리 하나 잡아서 미쳐버리라는 거디. 미친다는 것이 뭐냐면, 그 일에 대해 사명감을 느끼는 거에요. 사명감을 느끼면, 무엇을 해야하는지 계속 찾게 되거든. 밤을 새도 조금도 힘들지 않아요. 미치면 결론이 나올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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