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함민복‘, 긍정적인 밥’) 곤궁한 시인들 중에서도 유달리 가진 것 없기로 이름난 함민복의 자성은 염결하다. 시가 발표되던 십수년전에도 시인의‘ 긍정’은 희귀한 것 이었지만, 인세“ 삼백 원”에 마음을 데우는 성찰은 이제 전승 설화마냥 아득하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영역 불문의 용례를 보여준‘ 대박’은 출판계의 구호이자 생존책이 된 지 오래다. 사재기는 업계의 공공연한 관행이고, 쿠폰이나 마일리지 뿐 아니라 책 가격을 훌쩍 뛰어넘는 부록 따위를 내건 과다 할인 경쟁도 당연한 판매 방식이 되어버렸다‘. 빅 타이틀’ 하나면 하루아침에 운명이 바뀌는 판국이니 저작권을 중계하는 에이전트의 술수인지 번연히 알면서도 치킨게임에 뛰어들 수 밖에 없었다는 출판인의 자조 한 편에, 자본력을 앞세운 출판사가 외국 작가의 선인세로만 십수억을 지불했다는 뉴스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안 팔려도 내고 싶은 책을 위해 팔리는 책을 낼 수밖에 없다’는 어느 출판인의 말처럼 베스트셀러에 대한 욕망 자체는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오로지 어떻게 많이 팔것인가에 사로잡힌 출판 풍토 속에선 밀리언셀러는 나올지언정 고전이 빚어지긴 힘들 것이다. 더욱이 베스트셀러의 독식주의는 출판생태계를 기이하게 뒤틀어버렸다. 마케팅 비용이 제작비를 뛰어넘는 경우가 다반사가 되고, 제 살 깎기 식의 출혈 경쟁 탓에 공급율은 정가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진 채 회복될 줄 모른다. 이를 주도하는 대형 온라인 서점 네 곳의 매출은 나날이 급증하여 출판 시장 전체 매출의 40%에 육박하는데, 지난 10년간 동네 서점은 셋 중 하나 꼴인 1,258곳이 문을 닫았다(<2014 한국 서점 편람>). 요컨대 이문을 위해 다른 모든 것들이 내쳐진 형국이다. 책값을 둘러싼 손익분기 대차대조표에는 눈 먼 자본만이 있을 따름이다.

한 드라마 제작사가 간접광고 등을 내걸고 몇 군데 출판사에 5억원의 지원금 협찬을 제안했다고 한다. 한국적 기현상인 이른바‘ 드라마셀러’를 전면에 내세운 이 기발한 제안이 성사되면‘ 대박’에 사활을 거는 극심한 쏠림 현상은 더욱 일반적인 영업책이 될 것이다. 지식문화산업이니 컨텐츠서비스니 공공재니 하는 거창한 수사들을 걷어낸다 하더라도 오로지 자본으로 판가름나는 출판사업은 그 양적 수치가 어떠하건 궁핍할 뿐이다. 자본의 악력이 모든 것을 거머쥔 시대에 출판계 홀로 고고할 수야 없겠지만, 책이 로또의 동의어가 되고 잭팟을 터트려줄 투기 종목이 되는 세상은 불길하기만 하다.

건립 예정인 시립 부전도서관의 3개층에 상업시설을 들이도록 한 안이 통과되었단 소식과 십수억의 선인세를 지급했던 인문주의 표방의 유력 출판사에서 직원 6명을 일방적으로 해고했다가 철회한 해프닝은 책을 그저 얼마짜리 지식 상품 정도로 치환시켜 온 풍토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더불어 책값에 유난히도 인색하고 할인의 유혹에 쉽게 취하는 데다‘ 팔리니까 팔리는’ 책에만 간단히 넘어가는 우리의 잘못 또한 적지 않다. 자본에 맞설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식 중의 하나인 책은 내팽개치고 너도 나도 무력한 종이 뭉치를 꿰차고서, 밀리언셀러가 독주하는 기괴한 악몽 속으로 목하 돌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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