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자신의 얼굴을, 딛고 선 공간을, 지근거리의 사람들을 거리를 두고 바라본 적 있습니까? 거리를 둔다는 것은 대립각을 곤두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쉬클로프스키의 용어를 차용하자면, 그것은‘ 낯설게 하기’입니다. 쉽게 말하면, 낯설게 한다는 것은 여러분이 우스갯소리처럼 수차례 발화해 보았을‘ 나는 누구인가?’‘, 여기는 어디인가?’라는 의문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답을 애써 더듬으려는 멈춤의 몸부림이기도 하지요.

그렇다면 무엇을 멈출까요? 우선 표준, 수치, 통계 안으로 자신을 그리고 타인을 밀어 넣고 차별하는 강고한‘ 구별짓기’를 멈추는 겁니다. 그것은 학문의 장에 같은 발을 담근 벗들을 향해‘ 수시충, 지균충’이라는 비웃음을 날리는, 혹은‘ 서연고 서성한 중경외시’라는 암송- 목록 앞에 우쭐하거나 좌절하는 대열에서애써 이탈해 보는 시도이기도 합니다. 미셸 푸코의 논의로 녹여보면, ‘-하기’보다 어려운 것은‘ -않기’이며 그래서 더 큰 값어치 혹은 본질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따라서 이탈은 합류보다 우리에게 더 큰 비용을 요구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기’가 손쉬운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기 때문입니다. 당장에 나오는 결과물, 타인보다 우위를 점하는 위치 등은 우리를 자기 발로 선뜻 걸어 들어가는‘ 순응하는 신체’로 만들기 십상입니다. 오늘날 학자들은 이렇게 순응하는 우리를‘ 기업화된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때로는 멈추어 서서 타자 뿐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도 투입대비 산출이라는 획일적 경제학의 법칙을 적용하는 것은 아닌지 비판의 거리를 두고 낯설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오인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것이 노력을 하지 말라거나 스펙을 쌓지 말라는 부정의 명령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하나 들어 볼까요? 오래 전 방영된 드라마에 가족을 위해 평생을 희생한 주부가 나옵니다. 어느 날 그녀는 문득 억울한 마음이 듭니다. 하여 가출을 감행하지요. 50대 중반을 훌쩍 넘긴 그녀는 일정한 시간 뒤에 집으로 돌아옵니다. 다시 주부의 이름으로 불리지만, 이제 그녀는 숙명 혹은 팔자를 빌미로 자신의 이름을 삭제하던 예전의 그녀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같은 노력을 하고, 같은 스펙을 쌓더라도 멈추어 거리를 두고 질문할 줄 아는 사람과 그저 순응하는 사람은 천양지차입니다.

이제 가족의 성화가 아니라 자신의 선택으로 집에 되돌아 온 그녀의 행위에 대해 철학자인 이왕주의 언어를 원용하여,‘ 몸-관통하기’라고 명명해 봅시다. 간명하게 말하자면, 몸을 관통한다는 것은 자기(myself)를 놓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즉 여러분에게 홍수처럼 물밀듯 덮쳐 오는 수많은 정보, 강의, 영상, 명령어들을 여러분 자신의 필터로 걸러서 해석하고, 자의로 선택하는 용기를 말합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니체는 그것에 관해 하나의 답을 내놓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정직한 땀방울을 쟁여가는 연습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연습의 끝은 있을까요? 니체의 목소리를 한 번 더 빌면, 우리의 목숨이 붙어있는 한 용기를 내는 연습은 오직 끝없는 과정으로만 존재할 뿐입니다. 그리고 힘겹게 우리의 몸을 관통하여 토해내는 정직한 생산물만이 오직 여러분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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