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들은 긴 역사의 여러 장면에서 사회 변화의 주역으로서 등장한다. 이들은 학생사회를 넘어 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위상을 떨쳤다. 그러나 민주화의 정착과 안정된 사회 분위기는 학생운동에 대한 학생들의 무관심 속에서 잊혀져가고 있다. 부대신문이 광복 이후 학생운동의 현장을 들여다봤다.

학생, 독재 정권과 마주하다

1979년 10월 16일

친구와 함께 박정희 대통령을 타도하는 시위대를 쫓아갔다. 다리에 힘이 풀릴 때 쯤 부영극장에 도착했고 경찰과 몸싸움도 했다. 그때 밟힌 다리가 아직도 아리다. 분명 부영극장 건물이 부셔졌을 때 누군가한테 벽돌을 던졌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 누구를 맞혔는지 모르겠다. 우리 맞은편에는 자갈치 아지매들이 칼을 들고 경찰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살기가 굉장했다. 몸은 너무나 고단했지만 모두가 하나로 뭉친 것 같아 뿌듯한 날이었다.

학생들은 독재 정치로 억압받던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처음 목소리내기 시작한다. 부정선거를 일삼은 이승만 정권을 4.19 혁명을 통해 무너뜨리는 등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위한 운동을 전개하게 된 것이다. 4.19혁명과 더불어 우리사회에 큰 변화를 일으켰던 학생운동 중 하나가 바로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큰 역할을 했던‘ 부마항쟁’이다.

▲ 사진=부대신문 DB

1979년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체제가 더욱 심화됐던 시기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구속되면서 사회적 분위기가 위축되고,‘ 독재가 너무나 지독하다’는 여론이 팽배했다. 그러던 10월 15일, 우리학교 곳곳에‘ 오전 10시 독재타도와 민주화를 위해 도서관에서 모이자‘는 선언문이 뿌려진다. 이날엔 학생들의 참여가 저조해 실패하지만, 다음날 정광민(경제 78, 졸업) 씨가 인문관 306호 강의실로 달려가 유신독재정권에 맞서자고 외치게 된다. 정광민 씨는“ 당시의 유신 독재가 극에 달한 상황에서, 학생들이 한 목소리로 민주주의를 외쳐야 한다는 생각에 나서게 됐다”고 설명했다. 학생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밖으로 나섰고, 이에 동조한 학생들도 합류해 7,000여 명이 모였다. 정광민 씨는“ 시위를 하기 전 학생들은‘ 실패할 것이다’고 이야기했는데, 막상 시위가 시작되자 전교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많은 학생들이 참여했다”며“ 일반시민들도 경찰에 쫓기는 학생들을 숨겨주고, 먹을 것도 제공하면서 서로 하나가 됐었다”고 회상했다. 이들의 항쟁은 부산을 넘어 마산까지 퍼졌고, 결국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리는데 도화선 역할을 한다.

진압군의 방패는 6월의 함성을 막을 수 없었다

 

1987년 6월 18일.

경찰에게 붙잡혔다가 유치장에서 나온 지 3일째다. 아니, 친구한테 박종철 열사가‘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또 대통령 욕 좀 했다고 이렇게 잡혀 들어가다니. 유신도 아니고, 누가 신고했는지 몰라도 가만두지 않을 거다. 요즘 학교도 거리도 선거 직선제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으로 가득 차고 있다. 지나가는 곳마다 최루탄 연기도 자욱해 눈이 아플 정도다. 내일 학교에 가면 모두 시위하러 가서아무도 없을 것 같은데, 친구에게 같이 가자고 이야기해봐야겠다.

박정희 정권 몰락 이후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이 1979년‘ 12·12 군사 반란’을 통해 군대의 실권을 장악한다. 1980년 4월 전두환이 정권을 장악할 의도를 드러내자 전국의 학생들은 이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우리학교에서도 5월 9일 단과대학 학생단이 구국선언문을 만들며 신군부의 정권장악과 비상계엄에 항의했다. 하지만 18일, 광주에서 군대에 의한 학생들과 시민의 희생이 발생하고, 군부 세력을 몰아내는데 실패하게 된다.

이 실패를 두고 학생들 사이에서는 앞으로의 운동 방향을 두고 크게‘ 무림’계열과‘ 학림’계열로 나뉜다. 학생운동사상 최초의 집단적 이론투쟁이었다. 이 시기 최근 많은 주목을 받은‘ 부림(부산의 학림)사건’도 일어난다. 우리 도움말) 무림 계열은 아직 군부독재와의 전면적 투쟁은 시기상조라고 주장했고, 학림 계열은 지금이야말로 학생들이 군부독재와 전면적 투쟁을 벌여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 사진=부대신문 DB

학교 학생들을 비롯한 부산 지역에서 활동하는 민주 인사들을 제거하기 위해 신군부가 인위로 사건을 조작하고 감금과 고문을 자행한 것이다. 부림 사건과 더불어‘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으로 정권의 감시가 더욱 심해지자 부산 지역에서 공개적인 활동은 어려워진다. 하지만 우리학교에서는 암암리에 민주화를 위한 운동이 계속됐다.

1985년 2월 총선거를 기점으로 학생운동은 더욱 활성화된다. 또한 학생들은 노동자, 농민 등 대중의 생활을 경험하고 그들의 생존권 투쟁을 지원하는‘ 노학연대투쟁’을 시작한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호룡 전임연구원은“ 1970년대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 노동현장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이 커지게 됐다”며“ 역사변화의 주체가 민중에게 있다고 보는‘ 민중사관’의 도입으로 그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고 설명했다.

저항의 목소리가 계속되자 정권은 대대적인 탄압을 강행했지만, 학생들의 시위는 멈추지 않았다. 1987년 전두환 전 대통령의 ‘4·13호헌조치’ 발표와, 박종철 열사 사망 사건으로 학생들과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한다. 더불어 이한열 열사가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면서‘ 6월 항쟁’이 시작된다. 우리학교 학생들은 부산지역 항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부산지역의 학원민주화와 정권퇴진 등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결국 정부는 6·29선언을 통해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와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한다.

이처럼 1970~1980년대 당시 학생운동은 수많은 학생들이 참여했고 대중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근현대사의 한 획을 그었다. 정광민 씨는“ 당시에는 지금과는 달리 운동에 앞장서는 학생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심지어 존경하는 분위기라 시위에 참여하는 학생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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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협에서 한대련까지… 연대의 길로 들어서다

 

1987년 9월 2일

고 이한열 열사를 추모하기 위해 전국 대학생 조직이 만들어졌다. 그 이름은‘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이 전대협에 우리학교 총학생회장이 부의장으로 선출됐다고 한다. 왠지 우리학교의 위상이 높아지는 것 같아 뿌듯하다. 앞으로 더 열심히 시위에 참여해야지.‘ 구국의 강철대오’라는 깃발이 오늘따라 더 멋있어 보인다.

6월 항쟁 이후 전국적으로 대학‘ 조직’을 만들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7월 5일 연세대학교에 모였던 전국 각 대학의 총학생회장들이 전국적 대학생조직을 만들 것을 의논했던 것이다. 8월 19일, 전국 95개 대학 4,000여 명의 학생이 충남대에서 모여 제1기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전대협) 발족식을 가진다.

전대협은 1989년 임수경(한국외대 프랑스어과 86, 졸업) 씨를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전대협 대표로 보내고, 1990년 8·15범민족 대회를 추진하는 등 학생운동과 더불어 통일운동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계속되는 정권의 탄압에도 학생들의 운동은 계속되었고, 전대협은 학생사회를 넘어 국민에게도 영향력을 인정받는다.

전성기를 누렸던 학생운동은 1993년 전환점을 맞는다. 전대협이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이하 한총련)으로 재발족 한 것이다. 한총련은 각 대학의 단과대학 학생회장까지 참여하는 대의원대회를 구성하면서, 각 대학의 총학생회장만이 참여했던 전대협에 비해비교적 민주적 체제를 갖춘다. 한총련 출범식에는 약 10만 명의 학생들이 참여했을 정도로 큰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지나치게 이념적 투쟁을 추진하고 1996년 연세대 항쟁에서 폭력적 시위로 논란을 빚으면서 점차 학생들로부터 외면 받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4기 한총련이 대법원에 의해‘ 이적단체’로 규정되고, 이전까지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서울대에서‘ 비운동권’ 총학생회가 당선되면서 한총련의 활동은 더욱 위축된다.

▲ 사진=부대신문 DB

결국 2005년, 와해된 한총련 노선을 벗어날 것을 표명하며 새로운 대학생 조직으로서 한국대학생연합(이하 한대련)이 출범한다. 한대련은 비운동권 학생회와 연대하는 등 이전과는 다른 학생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다. 또한 등록금 문제를 공론화하고 등록금 인하를 위한 움직임을 보이면서 전대협과 한총련을 잇는 대표 대학생 조직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지나치게 편향된 정치적 입장을 보이면서 학생들로부터 비판을 받는다. 특히 2012년 통합진보당 폭력사태에 한대련 소속 대학생이 가담한 것이 밝혀지면서 학생사회에서 큰 비난을 받고 영향력이 줄어들게 된다. 최근에는 총학생회 선거에서 한대련의 노선에서 벗어난 선본이 우세한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그 예로 지난해 서울대 총학생회 선거에서 운동권 성향 선본들의 경선이 치러지자 일부 학생이 '투표 불참'을 주장했고, 투표율 미달로 선거가 무산된 바 있다. 고려대 총학생회는 한대련 활동에 대한 찬반 투표 결과(찬성 82.2%)에 따라 한대련을 탈퇴하기도 했다.

다시 한 번, 사회 변화의 주역이 되기 위해

학생운동의 위상하락에는 민주화로 인한 사회의 안정화가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우리학교의‘ 10.16 기념관’도 현재 학생운동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짐을 보여주는 사례다. 부마항쟁의 도화선이었던 10.16의 정신을 기념하고자 만들어진 10.16 기념관이 본래의 의도가 무색하게 현재는 주로 외부 행사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본부 관계자는“ 10.16기념관만의 행사를 전담하는 담당자는 없다”며“ 부마항쟁과 관련하여 학교 측에서 특별하게 추진하는 행사도 아직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학생운동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으려면 대학생 조직의 태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이호룡 책임연구원은“ 학생들의 정서는 점차 변화해왔지만, 대학생 조직의‘ 그들만의 리그’는 여전히 이어져 오는 것이 문제”라며“ 지금 학생들은 이전에 비해 개인주의적 성향이 짙어졌기 때문에 조직 운영 방법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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