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에 관한 생각, 장정일의 희곡 실내극?(1987). “잠시 암전. 천장에서 쥐가 뛰어 달리는 듯한 소음이 들리면서 서서히 조명이 들어온다. 어머니는 관객을 등진 채 소파에 앉아 있고, 아들은 서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그 ‘소음’의 정체에 관해 생각한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말한다.“ 저 소리는 무엇일까요. 낮고 은밀하게 우리 주위를 배회하는 소리” 또는 “우리 지붕 갉아먹는 소리” 곧, “총소리나 군화소리 혹은 호각소리, 철문을 여닫는 소음” 소리는 들리는 것이지 보이는 것이 아니질 않는가. 그러니까 소리는 가시적이지 않고 비가시적이질 않는가. 그리고 누군가는 가시적인 폭력보다 비가시적인 폭력이 더 은밀하고 강력하다는 것을 알고 있질 않는가. 그런 뜻에서 저 소리들은 삶을 관리· 관장·주재·인도·견인하는 폭력의 다른 말이다. 끝내,“ 삶이 톱질당하는 소리” 이희곡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한 대목은 짧은 무대지시문 속에 들어 있다. “하늘 가운데서 몰래 움직이는 북극성. 움직이며 미확인의 소음을 부풀릴 때, 아들은 더욱 큰소리로 고양이를 흉내를 낸다” 북극성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며, 움직이지 말아야하는 것이다. 그 항구불변성의 북극성이란 등대이며 길이며 사표이다. 말하자면, 정치적 북극성, 경제적 북극성, 사법적 북극성, 종교적 북극성 등등. 그런 북극성들이 위의 저 소리로서의 폭력을 재생산하고 있다는 사실의 각성. 요컨대, 북극성은 전혀 북극성이 아니라는 것, 외려 그것들은 삶을 톱질하고 거덜내는 데 온힘을 기울여 전력투구 중이라는 것. 장정일은 그런 북극성들을 봉헌하는 주기도문의 ‘아버지’를 ‘어머니’로 갈아치우는 예의 그 ‘살부의식’과‘ 모성에의 이끌림’으로 그런 북극성들의 그물망을 찢으려 한다. 그 끝장, 그 끝의 때가 청년 장정일의 한 때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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