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부터 국가 간의 대항이기는 했다. 거기에 민족과 이념이 가세하고 자본이 결탁했다.‘ 평화와 화합의 장’이라는 캐치프레이즈 반대편엔 반목과 갈등의‘ 흑역사’가 엄존한다. <포린 폴리시> 같은 매체는“1886년부터의‘ 올림픽 세기’가 인류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세기”였다고 비꼬기도 했을 정도니까. 개최며 참가며 수상까지 여전히 몇몇 강대국들의 잔치에 머무르는데도‘ 지구촌 축제’ 운운의 클리셰는 빠지지 않고 그 몇몇 중에서 개최의 호기를 잡은 정권은 더더욱 돋보이고자 돈 냄새 물씬 풍기며 자신들의 치적을 자랑한다. 지난 베이징 올림픽이 그랬고 이번에 막을 내린 소치올림픽이 그랬다.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스포츠 이벤트에 얼마나 개입할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 사례였다. 2008년의‘ 중화대관식’과 2014년의‘ 유라시아주의’가 그들만의 것이었으랴. 우리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태극 전사들 결전의 땅 입성’‘, 늠름한 여전사들 금빛 사냥’ 같은‘ 전쟁의 수사학’은 여전히 차고 넘쳐났다. 국위는 선양되어야 할 절대 가치가 되고 스포츠 엘리트는 이를 위해 투지를 불사르는 영웅들로 화해 무조건적인 응원 대상이 된다. 가히 ‘국가’와‘ 민족’을 함의한 불가침의 영역이다. 특히 김연아를 둘러싼 일련의 태도들은 이‘ 스포츠 공화국’이 앓고 있는 여러 합병증의 표출이었다. 한 기업은 방송용으로 내보낸 광고에서‘ 너는 김연아가 아니다. 너는 대한민국이다’라는 노골적인 카피를 내보냈고, 그녀의 첫날 경기는 다음날 모든 일간지에 큼지막한 사진이 박힌 1면 탑기사로 게재되었다. 판정 결과에 대한 공분은 금메달리스트에 대한 비아냥과 패러디 봇물로 이어지더니, 마침내 공영방송의 폐막식 중계에“ (실제로는 금메달인) 은”이라는 자막까지 등장했다. 그걸 또‘ 센스’라고 일컬으니 이 정도면 중증 아닌가.

납득하기 어려운 판정에 대한 시시비비는 이해할 수 있지만 스포츠에 덧씌워지는 과도한 의미와 광기에 가까운 풍경은 결코 달갑지 않다. 국가와 민족에 집착하는 태도가 전자요, 자본의 마케팅에 찌든 1등 지상주의가 그 후자다. 이들 폐해에서 자유로운 나라가 별로 없겠으나 한국의 스포츠는 확실히 유별나다. 자국 프로팀 간의 경기가 치르는 야구장에서 국민 의례는 아직도‘ 거행’되고, 경쟁 도시였던 뮌헨이나 안시에서 올림픽 거부 시위가 벌어지며 절반가량의 주민만이 유치에 찬성할 때 평창은 92%의 압도적 지지율을 보였다‘. 삼수’를 감행한 끝에 이룬 ‘쾌거’ 앞에서 스포츠 메가 이벤트의 허상을 알리는 목소리는 잦아들었다. 쇼트트랙의 금메달 소식부터 허겁지겁 전하고 바로 그 선수들 또래의 젊은이들이 어이없는 참사로 유명을 달리한 보도를 뒤로 돌려버린 뉴스는 스포츠 공화국의 적나라 한 단면이었다.

‘빅토르 안’에 대한 반응을 통해 이제 우리 사회가 어느 정도 성숙한 게 아니냐는 진단들도 더러 보였다. 물론 일정 수준 동의한다. 그러나 어느 결 고운 시인이“ 토고가 이겼대도 좋았겠다”고 말하며 광기 어린‘ 스포츠 애국’에 일침을 가한 것이 벌써 8년 전 월드컵 때의 일이었다. 아예 국경을 지워버렸던 시인의 한참 후에나 겨우 국적을 둘러싼 설왕설래가 왔을 뿐이다. 스포츠를 둘러싼 스포츠 아닌 것들의 악력이 더 거세졌다는 방증 아닐는지. 올해 예정된 ‘축제’들을 마음껏 즐길 수 없으리란 예감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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