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의 존재는 삶을 위해 투쟁한다. 삶을 위한 투쟁에는 윤리가 없다. 힘의 문제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이 나타나면, 나의 삶보다 중요한 어떤 것이 생겨난다. 그것은 바로 타자의 삶이다.

타자의 삶이 나의 삶보다 더 중요하다니 이 무슨 고상한 소린가. 삶을 위한 투쟁에 윤리를 운운하다니 이 무슨 안일한 생각인가. 경쟁이 판치는 이곳에서 살아남는 것이 얼마나 고단한 일인지를, 신자유주의가불러일으키는 욕망이 얼마나 달콤하고 또 내 삶에 중요한 것인지를, 레비나스는 모르는가, 아님 레비나스는 지나치게 순진한가. 타자의 철학자로 명성을 얻고 있는 에마뉘엘 레비나스. 그는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

2차 세계대전 나치에 의한 부모와 두 동생의 학살, 국사사회주의의 냉혹함, 스탈린주의와 테러리즘, 지역 간의 분쟁…, 20세기를 점철했던 이 참혹한 현실들은 레비나스로 하여금 서양철학을 근본에서 톺아보게 했다. 레비나스의 결론은 서양철학과 전쟁이 깊이 결탁해 있다는 것이다. 고래로 서양철학은 존재, 정신, 이성, 역사 따위를 중심축으로 하여 세계를 통일적으로 이해하려 하였다. 이런 시도는 타자를 동일자로 환원하는 동일성의 철학, 타자를 전체나 체계 속에서 파악하는 전체성의 철학으로 귀착하였다. 그런 한에서 거부할 수 없는 질서를 통해 인간을 강제하며 인간의 인격성을 중단시키고, 전체의 미래를 위해 인간을 희생시키는 전쟁은 서양철학의 전체론적 특성 속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서양의 근대는 이 점을 여실히 보여 준다. 근대적 주체는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개인으로부터 출발하여 인간과 사회를 포함한 세계 전체를 이해한다. 이 근대적 주체에게 소위 근대적 이성은 세계를 통일적으로 파악하고 지배하기 위한 도구로 봉사하였고, 세계는 계산 가능하고, 조작 가능한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인간의 이해(理解)와 이해(利害)는 인간 간의 갈등으로 힘의 논리로 이어졌고 곧 제국주의와 세계대전으로 극화되었다.

레비나스에서 관건은 폭력과 전쟁을 넘어서는 일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전체론을 그리고 그 속에 내재해 있는 자기중심성을 극복하는 일이었다. 그가 제시한 해결책은‘ 타자’와‘ 윤리’다. 타자와 윤리라니 이것은 또 무슨 말인가. 뭐 타자와 윤리적 관계를 맺으면 그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인가? 놀랍게도 레비나스의 대답은‘ 그렇다’ 이다. 그렇지만 타자와 윤리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타자와 윤리가 결코 아니다.

현재 우리 자유주의 사회에서도 타자는 존중된다. 그 이유는 그 또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처럼 타자도 인격을, 인간의 존엄성, 자유, 권리 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자유주의에서 타자가 존중되는 것은 타자의 타자성이 상실되는 한 즉 타자가 진정한 타자로 존재하지 않는 한에서다. 다른 말로 하자면 타자와 내가 또 무수한 타자들이‘ 동일한 독립적인 개인’으로 간주되는 한에서다. 타자의 다름과 독특성이 들어설 여지는 없다.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의 자리를 인정하자는 주장 또한, 나는 존중받아야 하고 나의 불가침의 영역은 안전하게 보장되어야 한다는 주장의 배면이다. 자유주의 사회에서 인권은 타인으로부터 안전한 거리를 유지할 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이 일면 타당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타자의 응답에 책임지고,
나의 것을 내어
타자에게 정성껏
대하는 삶.
이것이 인간의
인간다움이다"

 

자유주의가 상호성과 그 형식상의 평등성을 강조하는데 반해, 레비나스는 비대칭성 및 나에 대한 타자의 우위를 주장한다. 레비나스에서 타자는 나의 인식 대상이나 소유물이 아니며‘, 또 다른 나’로 전락하는 상대적 타자가 아니다. 타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나에게 통합될 수 없는 절대적 타자성을 지니고 있다. 타자는 이해의 영역을 넘어선다. 레비나스에서 윤리란 이런 타자와 관계하는 것. 다시 말해 타자를 책임지는 것이다. 이해가 보는 것이라면, 책임은 듣는 것이다. 이해의 관계가 능동성과 자율성에 기초해 있다면, 책임의 관계는 수동성과 타율성을 기초로 한다. 책임의 번역어‘ responsibility’는 응답하다는 뜻의‘ respond’와 관련되어 있다. 즉 그 어원적 의미에서 책임이라는 말은 어떤 부름이나 호소에 대한 응답을 뜻한다. 타자와 내가 맺는 이해의 관계가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면 타자와 내가 맺는 책임의 관계는 타자로부터 시작된다.

타자의 얼굴은 나에게 간청하고 명령한다. 타자의 호소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이다.“ 죽이지 말라” 다른 방식으로 말하자면“ 너의 이웃을 살게 하라” 얼굴의 이 명령은 나의 자족적인 삶을 나의 자의적인 자유를 문제 삼는다. 내 삶의 안위에만 몰두했던 동일자적 폐쇄성을 뒤흔들고 깨뜨리며 나를 타자로 나아가게 한다. 헐벗은 타자의 부름과 호소에 응답하고 그를 책임지는 것. 이것이야말로 나와 타자가 맺는 본래적 관계이자 평화의 관계다. 윤리적 책임의 특징은 그것이 무한하다는 데 있다. 책임은 나와 마주하는 타자의 요구와 부름에서 기인하는 것이기에 내가 행한 행동의 범위를 벗어나 있고, 그 책임에는 다함이 없다. 레비나스의 말처럼“ 위선자를 제외하곤, 난 책임을 다했어”라고 말할 수없다. 책임은 떠맡는 것에 비례하여 커져만 가는 까닭이다. 타자는 무한하고, 모두 다르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나와 타자가 맺는 책임의 관계가 나의 나됨을 이룩한다는 다시 말해 나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성립한다는 점이다. 헐벗은 타자가 이 사회에서 설 자리를 잃어버린 약자가 나보다 높고 크다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나와 타자는 개별적인 또 독립된 존재가 아니다. 나는 타자의 부름에 응답하고 그에게 책임을 짐으로써만 비로소‘ 나’일 수 있다.“나는 타자의 볼모다”“, 나는 타자의 책임에까지 책임이 있다”는 식의 언급도 이런 발상과 무관치 않다. 타자는 이미 내 앞에 있고 내 안에 스며들어 있다. 책임은 선택함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됨의 문제다. 따라서 책임은 타자에 대한 연민이나 동정에서 나의 도덕적 의식이나 양심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럴 경우 책임의 주도권은 내게 있게 될 것이다. 일반화되거나 보편화될 수 없으며, 따라서 대체 불가능한 이 책임은 타자의 호소와 명령에 대한 나의 응답이다. 레비나스는 말한다.

"태양 아래의 나의 자리,
나의 집, 이런 것들은 다른
사람에게 속하는 자리를,
즉 이미 나로 인해 제3세계
에서 억압받거나 굶주리고
추방당한 다른 사람에게
속하는 자리를 부당하게
빼앗은 것이 아니었을까"


나의 자리가 나의 자리일 수 없다는 이 극단적인 윤리적 의식은 신자유주의와 경쟁 이데올로기 속에서 허덕이는 우리에게 무시할 수 없는 깊은 울림을 제공한다. 레비나스는 우리 모두가 성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레비나스는 단지 인간의 성스러움을 이야기할 뿐이다. 레비나스는 인간의 근본적 됨됨이가 자기이해를 고수하고 확장하려는 코나투스적 존재에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동물적 삶에 다름 아니다. 자기 삶에 대한 집착은 넘어서야 할 대상이다. 타자에 응답하는 책임지는 삶. 나의 것을 내어 타자를 환대하는 삶.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인간다움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 김도형(철학) 강사

레비나스가 타자의 예로 든 과부, 고아, 이방인은 여전히 우리 시대에도 존재한다. 우리 시대의 타자는 경제적 약자, 성적 소수자, 난민, 이주 노동자, 노숙자, 여성일 수도 있고 삶의 터전을 빼앗긴 밀양의 주민들, 직장을 잃어버리고 길거리로 내몰린 해고 노동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와 대면하는 그 모두가 타자일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타자는 무한하고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타자에 응답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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