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대신문 제905호7면, 1985년 8월 15일자 농활 기사. 예나 지금이나 학생들은 여름이 되면 농가로 향한다

「가자, 불타는 녹두벌판 고난의 대지 위로」란 깃발아래 시작된 이번 농활은 지난 6월 22일 참가자 모집에서부터 어려움이 시작됐다. 정부의 관심증대(?)와 일부 언론의 편향된 보도에다 학교의 지나친 걱정까지 겹쳐 순탄치가 않았던 것.(중략) 쫓겨나다시피 했다며 말문을 여는 행정학과의 한 학생은 “길가에서 밤새도록 마을청년이라는 사람들한테 시달려 한 잠도 못자고 밤을 새웠다”면서 “지난 6월 29일 경찰당국의 대학 수색 때 우리팀 명단과 장소가 알려져 사전에 모종의 조치가 취해진 모양”이라며 떳떳하지 못한 정부의 조치를 질타했다. (부대신문 제905호 7면, 1985년 8월 15일자)

하계방학의 ‘꽃’으로 자리잡고 있는 대학생들의 농촌활동. 28년 전에도 학생들은 두 팔을 걷어 부치고 농가로 향했다. 80년대에는 농촌활동 역시 시대적 상황과 관련이 깊었다. 지금처럼 단순히 봉사활동이라는 차원을 넘어 정치적 의도를 가진 학생들의 활동 중 하나로 간주되기도 했으며, 때문에 정부 차원의 압력이 가해지기도 했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몇몇 학과의 농활팀은 마을회관에 자리를 잡았다가 마을 청년을 가장한 면직원들의 폭언과 강요에 의해 빈집으로 숙소를 옮기기도 했다. 당시 이 기사를 작성한 김성우(건축공 84, 졸업) 씨는 “당시의 학생들은 농활을 통해 정치적인 도모를 하기도 했다”며 “때문에 정부에서 학교에 직접적인 제재를 가한 것은 아니지만 마을에 지침을 내려 학생들의 농촌활동을 제한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농촌활동에 참여하는 것 자체에 어려움이 따르기도 했다. 남상수(법학 84, 졸업) 씨는 “그 당시의 농활은 단순한 봉사활동을 넘어선 개념으로 여겨져 지금만큼 학생들의 참여가 잘 이뤄지지는 않았다”며 “이는 당시 농활을 주최한 총학생회에게 많은 어려움 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러한 박대 속에서도 학생들은 사회적 분위기로 형성된 주민들과의 괴리감을 해소하기 위해 밭매기, 논작업, 소꼴베기 등을 하며 하루 12시간을 웃도는 강행군을 펼쳤다. 이때부터 주민들의 선입견은 눈 녹듯 조금씩 사라지고, 학생들을 보는 시선 또한 차츰 바뀌어갔다. 며칠이 지나서야 이들은 한데 어울려 농사일을 해나간다.

지금도 학생들은 농촌과의 소통을 위해 여름만 되면 농가로 떠난다. 이수미(문헌정보 3) 씨는 “농민들의 삶을 배우고 이해하기 위해 농촌활동을 하러 떠난다”며 “농활은 일을 돕는 것 뿐만이 아니라 함께 어울리며 서로간의 ‘정’을 느낄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총학생회 최소정(특수교육 4) 회장 역시 “농활은 여전히 학생들이 가장 많이 참여하는 행사”라며 “매년 꾸준히 1,000명 정도의 학생들이 농활에 참여해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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