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락이라던가 진의에 대한 고려없이 여차하면 ‘종북’으로 몰아부치는 작금의 분위기를 보면 이 미욱한 글에도 빨간 딱지가 붙는 게 아닐까 싶어 심히 간이 떨린다. 유신시대의 공안검사가 세월의 저편에서 건너와 청와대 비서실장에 임명되었듯 이제는 어두운 저편의 것이라 불러도 좋았을 ‘종북’, ‘빨갱이’, ‘적화세력’ 따위의 말들이 되살아나 서슬이 퍼렇다. 반대는 곧 친북이요, 종북이다. 그 한없이 단순한 등식이 노동조합을 법 밖으로 쫓아내고 진보정당을 결딴냈다. 정책에 대한 반대만이 아니다. 마땅히 치러야 할 사회적 비용이건 앞으로 몇 세대를 두고 주의 깊게 살펴야 할 의제건 죄다 ‘친북 좌파’라는 말로 제압하려 든다. 정당해산을 위해 ‘민중’이라는 표현을 ‘종북’과 동의어로 둔갑시킨 국무총리의 한국어 실력은 이 정권의 수준과 의지를 아울러 보여준 한 상징이리라.  

  달리 말할 것도 없다. 이 정권이 취임한 여덟 달 동안 가장 확실히 보여준 통치 원칙 중 하나는 공포 정치요, 주된 전략은 매카시즘이었다. 너 빨갱이지? 다른 모든 의문은 여기서 멈췄다. 물음을 던진 쪽은 악착같이 주홍글씨를 새기려 들 뿐이고, 물음을 받은 쪽은 어떻게든 혐의를 벗는데 사력을 다할 따름이다. 몇 세대 전에 마감했어야 할 망령이 여전히 얼마나 막강한가를 헤아려야 하는 이 땅에서 민주는 발 붙일 데 없고, 상식은 들일 데 없다. ‘기울어진 운동장’이 된 지 오래인 언론 지형도는 ‘나라가 이 지경인 것은 종북좌파 탓’이라는 보도를 지치지도 않고 해대며, ‘빨갱이’를 규탄하는 모든 언설은 ‘애국’으로 칭송받기에 이른다. 시위 교민을 상대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는 여당 의원의 겁박에는 우리가 꿈꿔야 할 어떤 미래도 담겨 있지 않다. 이 빈한한 정치를 지켜봐야 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불행이다. 

엄밀히 말할 것도 없다. 이는 보수의 영역이 아니고, 민주주의 정치가 아니다.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보수가 극단적 국가주의에 자리를 빼앗긴 상황이고, 갈등의 조정을 제도화로서 도모해야 할 정치가 참언에 휘둘리는 형국이다. 반대쪽을 오로지 압살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극우가 폭주하는데, 말들은 가팔라지고 망령은 물러갈 줄 모른다. ‘반공’을 여전히 제일의 ‘국시’로 숭상하며 탈핵이나 평화, 복지 같은 금세기의 의제마저도 ‘종북’으로 몰아대는 저들과 대체 무슨 얘기를 나눠야 좋단 말인가.   

한 원로 신부가 시국 미사에서 내놓은 발언을 두고 뭇매가 쏟아진다. 전체 강론 중 일부였던 연평도 부분만 쏙 끄집어내어 빨갱이 낙인을 찍고 일제히 두들겨대는 방식은 예와 같다. 맥락도 진의도 필요없이 ‘일언이폐지’하여 종북이라는 그 언설들은 공포스럽고도 혐오스럽다. 빈자를 먼저 위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양심’과 2백여차례 넘게 해고 노동자를 위해 미사를 집전한 사제단의 ‘양심’은 다르지 않을텐데, 청와대는 기어이 ‘사제단의 조국이 의심스럽다’ 말한다. 개인의 기본적 권리를 억누르는 국가주의적 사고뿐 아니라 결코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전체주의적 발상을 무감하게 내보이는 그 의심은 그저 졸렬할 따름이다. 적어도 케케묵은 이념이 성직자의 양심을 가리지 않는 자리에서야 간신히 조국을 꺼내들 수 있는 것 아닌가. 종북 타령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한 이 나라의 오늘은 끝끝내 가련하고 가난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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