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지는 않다. 자신만의 기억도 의지도 없다. 그럼에도 활보한다. 그들은 아름답지도 매력적이지도 않다. 그런데도 이 산죽은자(Living Dead)들은 한 나라의 단위를 넘어 전세계적인 문화적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대중 문화의 모든 영역에 마치 바이러스처럼 창궐하고 있다. 분명 ‘좀비’(Zombie)라는 이름의 이 아이러니한 기표는 우리 시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하나의 키워드라 할 만하다.

  그리 흥미를 끌 것 같지 않은 이 추악하고 혐오스런 괴물은 본래 부두교의 주술사들이 살아있는 사람의 영혼을 빼앗아 입맛대로 부리기 위해 고안된 주술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그래서 좀비는 종종 근대과학문명의 원시적이고 무의식적인 공포를 상징하곤 했다. 그런데 과학의 세례를 받아 변종 바이러스를 보균하게 된 최근의 좀비는 다소 다른 양상을 보인다. <바이오하자드>, <나는 전설이다>, <월드워Z>와 같은 블록버스터 게임이나 영화에서 좀비에 대한 공포는 좀비의 움직임이나 감염 속도 등을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다는 무기력함에서 비롯된다. 통제를 위해 만들어진 좀비가 통제 바깥이 되어버림으로써, 언제든 우리 안에 침입할 수 있다는 가정이 성립되는 것이다.

  푸코가 적절하게 지적했듯, 근대 이후 우리는 삶권력적 배치 아래서 스스로 감시하고 통제하는 장치 시스템을 구현해왔다. 마치 그것이 자연스러운 풍경인 것처럼. 더욱이 신자유주의 이후 우리는 더욱 더 시스템 내부로 편입해야만 삶의 참다운 행복이 있는 것으로 가정하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살아가고 있다. 마치 좀비가 되지 않으려 분주하게 움직이는 저 수많은 좀비서사 속의 주인공들처럼. 

  좀비는 단지 스크린 속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가상적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쓰다듬고 매만지는 모든 살아있는 육체들의 다른 이름이며, 그 육체에 기입된 권력이라는 기표의 형상화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좀비에 열광하는 이유는 혐오스러우면서도 외면할 수 없는 좀비가 거울에 비친 우리의 얼굴과 꼭 닮았기 때문이다. 좀비가 부두술사들의 노예로 부려졌듯, 우리 또한 시스템의 유지를 위해 좀비처럼 무기력한 걸음을 옮기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좀비는 모든 시스템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양가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그들은 시스템의 통제와 감시 아래가 아니라 그 바깥에서 언제 어딘지도 모르게 맹목적으로 침투한다. 그들은 시스템의 불온한 적이며 권력의 호명 없이도 존재하는 그 무엇이다. 좀비가 전염성을 자신의 가장 강력한 무기로 장착하게 되면서, 시스템의 외부는 상상 가능한 것이 되었다. 이제 좀비 서사는 단지 우리의 지금 모습만이 아닌, 우리의 이상적인 모습으로까지 승격한다. <웜바디스>의 기발한 사랑과 해피엔딩은 그 예가 아니겠는가? 

  어쩌면 우리가 상상해야 할 좀비는 그저 나즈막한 소리를 내고 엉성하게 걸으며 살아있는 육체를 물어뜯는 천편일률적인 모습이 아닐지도 모른다. 좀비는 단지 적대해야 할 타자가 아니라 그 자체로 고유한 개체성을 지닌 존재, 심지어 영화 <나는 전설이다> 감독판 결말이 암시한 바처럼 기존의 인류와 공존해야 할 새로운 인류일 수도 있다. 결국 좀비에 관한 상상력은 우리와 타자의 삶에 대한 인식 지평을 징후적으로 보여준다. 좀비 서사의 확산이 단지 서양 문화의 괴팍한 성향을 무분별하게 수입한 것으로만 여겨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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