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서사와 증언의 (불)가능성 -「순이 삼촌」과 <지슬>에서 공통적으로 배제되는 이중의 타자 발견하기

이 글에서는 4.3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노력이 제도적 영역 밖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고, 그 접근법의 하나로 4.3 사건의 증언 서사를 살펴보았다. 4.3 사건의 증언 서사가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불가능하다면 어떠한 한계에 부딪치고 있으며 어떤 식으로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지를 밝혀내는 것이 이 연구의 목적이다. 그런데 이 글에서는 4.3 사건을 대한민국이라는 근대 국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반대 이념을 폭력을 통해 계획적으로 배제하는 동시에 기득권의 권력과 질서를 공고히 한 사건으로 보고 있으며, 실제 피해를 입은 것은 대부분 일반 양민들이었다는 ‘양민학살론’을 4.3을 보는 기본적 관점으로 전제하고 있다. 때문에 4.3 사건에 대한 증언 서사들이 이처럼 국가에 의해 배제된 ‘타자’들을 얼마나 잘 재현해내고 있는지에 특히 주목하여 4.3 사건의 증언가능성 여부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4.3 사건의 대표적 증언 서사 작품으로는 현기영의 단편소설인 「순이 삼촌」과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이 있다. 두 작품은 각각 문학 매체와 영상 매체에서의 최초의 증언 서사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질 뿐만 아니라, ‘양민학살론’의 시선에서 4.3 사건을 바라보고 있으며 이 시선이 4.3 사건에 대한 사회적 담론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가진다. 때문에 4.3 사건이 서사화되는 양상을 살펴보기에 적절하다고 생각하여 이 글의 분석 대상으로 선정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4.3을 증언하고 배제된 타자를 살려내기 위해 노력한 두 작품 속에서도 다시 한 번 배제되는 타자를 발견하여 이들을 ‘이중의 타자’라 이름붙이고 이들이 어떤 이유로 또 다시 배제되고 있는지, 그리고 이들의 증언에 귀 기울일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를 찾아보고자 하였다.

「순이 삼촌」과 <지슬>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이중의 타자’는 여성, 서북청년단, 그리고 재일제주인이 있다. 「순이 삼촌」의 ‘순이 삼촌’은 작품의 중심인물임에도 화자에 의해 대리 증언되는 수동적 위치에 머물고 있으며 <지슬>의 ‘순덕’ 역시 대사를 갖지 못하는 인물로 표상된다. 오히려 그녀들의 목소리는 남성들에 의해 전유되고, 정작 그 자신은 가부장제 윤리의식 아래 증언하는 것이 거부당한 채 피해자의 이미지에 갇힌다. 결국 가부장제 윤리의식의 억압과 일방적인 피해자 이미지의 강요는 제주 여성을 ‘말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 이들을 4.3에 대한 담론으로부터 배제시켜버린다.

한편, 「순이 삼촌」은 서북청년단 출신인 ‘고모부’를 서북청년단을 대변하는 인물로 등장시킨다. 하지만 그의 발언은 서북방언을 통해 발화됨으로써 그 이질성과 가해자라는 꼬리표로 인하여 진정성을 상실하게 되고 결국 허울뿐인 사죄와 반성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두 작품에서 서북청년단을 표상하는 공통적인 방식은 이들을 대표적인 가해자로 등장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비단 작품 안에서 뿐만 아니라 많은 증언 사례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경향이다. 그런데 이처럼 서북청년단에게만 4.3의 책임을 떠넘기는 것에서 국가가 이 사건의 실질적인 가해자였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책임을 전가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서북청년단 역시 한국 근현대사를 지배한 거대 담론의 대립에 의해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4.3의 진상을 보다 명확히 규명하기 위해서는 이들 개개인에 대한 윤리적 판단에 앞서 당대 사회에 대한 이해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가해자’라는 점 때문에 그들의 증언은 변명으로 치부되어 4.3에 대한 담론에서 배제되고 있다.

여성과 서북청년단이 왜곡되고 재구성된 이미지로나마 두 작품 속에 등장하는 것에 비해 재일제주인은 그 모습조차 찾을 수 없다. 그들은 제주를 버리고 도망갔다는 오명 때문에 4.3 사건에 대한 담론에 참여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하지만 ‘한신교육투쟁사건’과 같은 사건을 통해 그들이 지리적으로는 제주를 벗어나 있었지만 정치, 사회적으로 4.3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며 그 고통을 함께 겪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들이 한국의 국가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운 입장에 있기에 오히려 새로운 관점에서 4.3 사건을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이 김석범과 같은 작가를 통해 증명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존재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이방인으로 여겨져 4.3 담론의 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4.3 사건을 재발견하려는 증언 서사들에서조차 배제당하는 이들의 존재는 증언 서사의 한계를 보여준다. 이는 증언서사의 의의조차 의심하게 하지만 증언서사의 의의를 그 한계가 아니라 존재 자체에서 찾음으로써 우리는 증언서사의 의의를 새롭게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증언서사를 끊임없이 생산함으로써 배제되는 이들 역시 끊임없이 재발견하는 것이 그 진정한 의의라는 것이다. 또한, 생산하는 입장과 수용하는 입장에서 공통적으로 필요한 것은 난민적 위치에서 증언서사를 바라보는 것이다. 특정한 집단이나 이념에 귀속되지 않은 채 사건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사건을 그 자체로 사유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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