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회 부대문학상 소설 부문 가작

소년은 땅속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동굴 속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처럼 깊고 아득한 소리였다. 그는 방바닥에 귀를 바짝 갖다 댔다. 소리는 더욱 선명해졌다. 무언가가 은밀하게 작업을 행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한두 놈이 아니었다. 길게 자란 앞발톱으로 땅바닥을 긁어 대고 있을 놈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두더지들. 어두운 방 안에 앉아 있으면 항상 그들을 느낄 수 있었다.

소년은 다시 한 번 문자메시지를 확인했다.

‘폐차장, 11시’

그러나 시간은 이미 11시를 훌쩍 넘어 있었다. 미친 새끼. 그의 입을 통해 저절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벤츠’의 문자였다. 벤츠는 항상 아버지의 벤츠를 타고 학교에 왔다. 그 때문에 모두 그를 벤츠라고 불렀고 벤츠 자신도 그 별명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는 자기주장이 강한 편이 아니었다. 언제나 남들이 그렇다고 하면 동의하고 마는 그런 아이였다. 그랬던 그가 오늘 밤 소년에게 사람을 죽이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1999년, 겨울이었다. 소년은 지겨운 열일곱 살의 끝자락을 보내고 있었다. 새로운 한 세기, 새로운 천 년을 준비하느라 사람들은 몹시 들떠있었다. 그들이 무엇을 그리도 애타게 기다리고 준비하는지 소년은 알 수 없었다. 아마 새로운 시작이거나, 혹은 끝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거리를 걷다 보면 어디에서나 밀레니엄이라는 단어를 찾을 수 있었고 그것은 하나의 상품으로, 축제로, 또 다가올 두려움으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특정 날짜만 되면 많은 사람의 입에서 회자되는 종말론이 이번에도 고개를 내밀었다. 지구가 하루라도 빨리 멸망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종말론자들은 무슨 건수만 생기면 스멀스멀 뭍으로 기어 나오곤 했다. 그들은 현세에 아무런 미련이 없거나, 혹은 미련이 없을 만큼 인생이 고달픈 인간들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들의 주장을 쉽게 흘려 넘길 수 없었다. 2000이라는 숫자를 표시할 수 없는 컴퓨터들이 오작동을 일으켜 전 세계적인 혼란을 가져온다는 가설은 왠지 그럴듯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소년은 정말로 세상이 끝나버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유일하게 친구라고 부를만한 녀석은 사람을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어머니는 이미 한 달 전에 집을 나간 뒤로 그 행방이 묘연했다. 어쩌면 이들의 행동은 세기말이라서 가능했던 건지도 몰랐다. 세기말이라는 시공간이 주는 생경함이 그들을 미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날도 평소와 같았다. 안방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그것은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매일 밤의 의식이 다시금 시작된 것이다. 목사인 아버지는 매일 밤 트렁크 팬티 차림으로 혁대를 채찍처럼 휘둘러 댔다. 그 혁대는 어머니의 등에 선명한 궤적을 만들어 냈다.

“또 어떤 놈이랑 붙어먹었어?”

아버지는 어머니를 추궁하고 있었다. 추궁은 언제나 남자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실제로 존재하는지조차 불분명한 인물이었다. 그 남자는 부처, 마호메트, 아후라 마즈다 또는 이름 모를 종교의 신이 되기도 했고, 가까이는 다른 교회의 목사가 지목되기도 했다. 아버지가 섬기는 하나님조차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항상 아내의 부정을 의심하고 두려움에 떠는 사람이었다.

소년은 문을 굳게 잠그고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혁대의 소리를 들으며, 쾌락으로 내지르는 신음과 구분되지 않는 비명을 들으면서, 그는 몸을 작게 웅크리고 있었다. 소년은 그들의 모습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어두운 방 안에 앉아 기도를 올리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는 언제나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었지만, 그의 기도는 누구도 구원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들은 함께 식사를 했다. 소년은 그 시간의 침묵을 견디기 어려웠다. 어머니는 자신의 등에 난 상처를 무척이나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그녀는 절대로 등이 파인 옷을 입지 않았다. 그러나 밤사이 붉게 달아오른 상처들은 목으로까지 길게 이어져 소년의 눈에 자주 띄곤 했다. 아버지는 전날 밤 보여준 광기 어린 모습과는 전혀 딴판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식사하는 그의 표정은 더없이 온화해 보였다.

아버지는 신도들에게 평판이 좋은 목사였다. 밤의 광기를 낮에는 신도들 앞에서 열성적인 설교로써 표출하는 건지도 몰랐다. 아마 그 광기에 휘말린 신도들은 참회의 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날 아침, 소년은 집을 나서기 전에 안방의 열린 문틈으로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았다. 바닥을 향해 얼굴을 기울고 있는 탓에 튀어나온 목뼈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그녀는 바닥에 앉아 성경을 찢고 있었다. 종이를 한 장 한 장 잘게 토막 내고 있었다.

“너는 반드시 목사가 되어야 한다. 어둠을 비추는 밝은 빛이 되어야 한다.”

언젠가 어머니가 소년에게 한 말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소년은 작은 어깨를 붙들린 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만 있었다.

그날 아침 소년은 섬뜩함을 느꼈다. 그녀는 갑작스레 변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어머니의 마지막이었다. 소년이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그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너 언제까지 참고 살 거냐?

바람이 매섭게 불던 날 밤이었다. 벤츠는 오들오들 떨면서 소년에게 그렇게 말했다. 차가운 겨울바람 탓인지 사람 없는 폐차장의 풍경이 더욱 싸늘하게 느껴졌다. 가로등 하나만이 외롭게 서서 그들을 비추었다. 누런 개 한 마리가 그들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종종걸음을 치며 어둠 속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소년은 벤츠의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무언가를 참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옳았다. ‘언제까지 기다릴래?’ 그것이 옳은 질문처럼 여겨졌다.

소년의 대답이 없자 벤츠는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말했다.

“아 존나 춥네. 일단 집에 가면서 얘기하자.”

벤츠는 얇은 맨투맨 티셔츠 하나만 걸치고 있었다. 그가 몸을 떨면서 만들어내는 진동이 소년에게 그대로 전해져 왔다. 벤츠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두터운 오리털 파카를 차려입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비싸고 따뜻해 보이는 물건이었다. 아마 그 점이 철기의 눈길을 끌었던 모양이다.

소년과 벤츠는 그날도 철기의 문자 메시지를 받고 폐차장으로 집합했다.

‘폐차장, 11시’

철기는 언제나 간결하게 문자를 보냈다. 그 간결함이 소년에게는 두렵게 느껴졌다. 그것은 거역할 수 없는 명령과 같았다. 장소와 시간 외에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는 듯이, 오히려 너희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으냐고 반문하는 듯한 그 문자는 시도 때도 없이 그들을 불러들이곤 했다. 철기는 용건이 있건 없건 그들을 부르곤 했다. 그날도 철기는 특별한 이유 없이 그들을 부른 듯했다.

소년과 벤츠는 11시가 되기 십 분 전에 미리 폐차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한 시간이 지나도록 철기는 나타나지 않았다.

“씨발 새끼, 또 물 먹이네.”

벤츠가 욕을 내뱉었다. 그는 철기 앞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순한 양이었다. 그러나 철기가 없을 때면 그러한 순종에 대한 보상심리인지 더욱 힘주어 그를 욕하곤 했다. 언제는 그 욕이 철기의 귀에 들어가 심하게 두들겨 맞은 적도 있었다. 물론 철기는 얼굴은 때리지 않았다. 벤츠는 부잣집 아들이었기 때문에 얼굴에 상처가 남을 경우 일이 커질 것이 분명했다. 철기는 벤츠의 정강이를 걷어차고 배를 때렸다. 아마 벤츠로서는 처음 맛보는 무서운 린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한 번을 제외하고는 철기에게 맞아본 적이 없었다. 벤츠는 주기적으로 철기에게 돈을 상납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자정이 넘어갈 무렵 철기는 폐차장에 나타났다. 소년과 벤츠는 내색하진 않았지만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철기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일종의 충성심 테스트였다. 그는 일부러 뒤늦게 약속장소에 나타나곤 했던 것이다. 둘은 섣불리 폐차장을 뜨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철기는 어디서 주워온 것인지 다 찌그러진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끼익 거리는 소음을 내는 자전거가 그들 앞으로 다가와 멈춰 섰다. 찐빵같이 넓적한 철기의 얼굴이 가로등 불빛 아래로 들어왔다. 그는 벤츠의 오리털 파카를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져서 말했다.

“이야 벤츠, 옷 좋네?”

잠시 벗어보라는 뜻이었다. 벤츠는 머뭇거리더니 이내 파카를 벗어 철기에게 건네주었다. 철기는 자신의 옷 위에 파카를 겹쳐 입었다. 외투를 두 개나 겹쳐 입자 그는 마치 살찐 곰 같은 형상이 되었다. 그는 ‘존나 따뜻해!’ 라고 외치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폐차장을 한 바퀴 돌더니, 잠시 후 그대로 자전거 핸들을 돌려 폐차장 입구 쪽을 향했다.

“아!”

갑자기 멈춰선 철기는 두툼한 옷 속을 이리저리 뒤지기 시작했다. 그는 외투 주머니 속에서 너덜너덜한 책 한 권을 꺼내어 소년을 향해 힘껏 던졌다. 책은 속지를 펄럭거리며 하늘을 날더니 이내 소년의 발 앞에 툭 하고 떨어졌다. 그것은 여기저기 찢긴 채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잘 봤다.”

철기는 한 번 씩 하고 웃더니 페달을 밟으며 유유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자전거의 끼익 거리는 쇳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뭐 보냐?”

학기 초, 야간 자율 학습이 처음으로 시작된 날이었다. 문제집을 한편으로 제쳐놓고 책을 읽고 있는 소년에게 철기가 말을 걸어왔다. 소년은 말없이 철기에게 책 표지를 보여주었다.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

“고상한 거 읽네. 이러기야 정말?”

소년은 대답 대신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 읽으면 나도 빌려줘. 한 번 읽어보게.”

 

소년과 벤츠는 집을 향해 걸었다. 그들은 가로등이 드문드문 켜진 골목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번엔 진짜란 거야. 세계는 온통 혼란에 휩싸일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

“아 정말 어리석은 중생이구나.”

벤츠가 한탄하듯이 말했다. 얼마 후, 그들이 어느 고급주택의 거대한 대문 앞에 도착했을 때 벤츠는 여전히 몸을 떨면서 말했다.

“난 정말 세상이 끝장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소년은 벤츠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했지만 그렇다고 맞장구쳐주고 싶지는 않았다. 집으로 가는 내내 벤츠는 마치 광신도처럼 인터넷에서 주워들었던 종말론을 소년에게 설파해대고 있었다. 소년은 그런 것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벤츠가 한심하게 여겨졌다.

“내일 봐.”

짧은 인사와 함께 그들은 헤어졌다. 벌써 시간은 새벽 한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소년은 집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소년과 철기는 벤츠보다 오래된 사이였다. 벤츠는 고등학교 때 처음 만났지만, 소년과 철기의 인연은 중학교 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리고 과거의 그들은, 적어도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이였다고 소년은 기억한다.

철기는 반에 한둘씩은 있는 주먹 좀 날린다는 애들 축에 속했다. 존재감을 애써 내비치지 않아도 반 아이들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무게감 있게 맨 뒷자리에 앉아 반을 대표하는 의견을 말하는 아이였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소년에게 말을 걸어왔다.

“너 공부 잘한다며? 담임한테 다 들었어.”

3학년 학기 초였다. 반 아이들 모두 서로에 대한 경계심과 호기심을 함께 내비치던 시기였다. 쉬운 놈으로 보이기 싫어 말 많은 놈들조차 그때만큼은 다들 점잔을 빼고 앉아 있었다. 임시반장을 맡았던 철기는 아마 담임에게 소년의 성적에 대해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너 전교에서 노는 애라며? 나 공부 좀 가르쳐 줄 수 있냐?”

소년은 그런 질문을 하는 철기가 꼭 어린아이처럼 느껴졌다. 공부를 가르쳐 달라니? 마치 눈에 띄는 물건마다 무조건 사달라고 떼쓰는 아이 같았다. 소년은 철기의 말이 양아치와 모범생 사이에 으레 존재하는 커넥션을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소년이 귀찮은 숙제를 대신 해준다거나, 시험 칠 때 작은 종이에 적은 답안지를 건네준다거나 하는 역할을 하고 철기는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그를 건드리지 않는 방식 말이다. 그때 철기는 마치 동경하는 듯한 눈빛으로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철기는 나름대로 공부도 열심히 하는 아이였다. 공부하는 방법을 잘 모르는 듯했지만 구제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났고, 중학교 3학년 동안의 노력 덕분인지 철기는 소년과 함께 지역 명문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물론 턱걸이하는 성적이었지만, 그 나름대로 선방한 셈이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부터 그들의 관계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집 앞에 도착한 소년은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추위를 잊으려 쉬지도 않고 달렸던 것이다. 소년이 집 안으로 들어서자 어두운 거실에 텔레비전 불빛만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는 소파에 누워 다소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다. 어머니가 사라진 후 아버지는 눈에 띄게 불안해진 모습이었다. 물론 그는 모든 일에 의욕을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았다. 대신에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더욱 자기 일에 집착하는 것처럼 보였다. 집으로 돌아오면 그는 항상 녹초가 되어 잠들어 있었다.

소년은 텔레비전을 끄기 위해 리모컨을 들었다. 심야 뉴스가 방송되고 있었다. 브라운관에는 종말을 대비하는 사람들의 독특한 모습들이 비치고 있었다. 마트에서 생필품을 사재기하는 사람들, 시골로 떠나 비닐하우스 안에서 합숙생활을 하는 사람들, 그리고 믿는 자만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 설파하는 사이비 종교의 모습 등이었다. 사이비 종교의 교주는 화려한 꽃이 수놓아진 한복을 입고 강단에서 소리 지르고 있었다.

“곧 닥쳐올 심판의 날, 오직 선택된 자들만이 천국으로 갈 것이다!”

교주의 얼굴은 모자이크로 가려져 있어 알 수 없었지만, 음색으로 보아 중년 여자로 짐작되었다. 신도들은 다들 손을 하늘 위로 뻗은 채 울부짖고 있었다. 남자들은 하얀 두루마기를, 여자들은 하얀 소복을 입고 있었다. 그 무리 속에서 소년은 자신의 눈길을 잡아끄는 한 여자를 발견했다. 얇은 천 속으로 비치는 그녀의 기다란 상처가 눈에 띄었다. 그녀는 다른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울부짖는 신도 중 하나였다. 소년은 그녀를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었다. 그러나 카메라는 기대를 배반하듯 이내 다른 곳을 비춰버렸고, 소년은 자신이 본 것을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파카 사건 이후 벤츠는 눈에 띄게 말수가 줄어들었다. 물론 그는 철기의 부름에 언제나처럼 성실하게 응답했고 주기적으로 자신의 용돈을 상납하고 있었지만, 소년과 함께 있을 때면 꼭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어딘가 홀린 사람처럼 항상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 변화를 철기도 눈치챈 모양인지 그에게 말 거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날은 체육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5교시가 시작되자마자 반 아이들은 복도에서부터 축구공을 이리저리 주고받으며 운동장으로 튀어 나갔다. 입시에 지친 아이들에 대한 배려인지 체육선생은 한 주에 한 번씩은 하고 싶은 운동을 하도록 해주었다. 종목은 거의 축구로 결정 나곤 했다. 그렇게 한바탕 땀을 흘린 뒤, 아이들은 교정에 드리워진 나무 그늘을 각자 하나씩 차지하고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소년은 그날 축구에 참여하지 않았던 벤츠를 바라보았다. 벤츠는 나무 그늘에 앉아 예의 그 심각한 표정을 짓고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여자 반 아이들이었다. 여자아이들은 땀 흘리는 일이라면 질색이라는 듯 체육 시간만 되면 화단 쪽에 우르르 몰려 앉아 수다를 떨곤 했다. 소년은 벤츠가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벤츠는 평소에 소년에게 절대로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지만, 소년은 어렴풋이 그가 누구에게 관심이 있는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는 누가 봐도 호감을 가질만한 아이였다. 가식 없이 순수한 모습이 매력인 그녀는 친구와 얘기를 나누면서 깔깔 웃어대다가, 쉴 새 없이 떠들어대다가, 자신의 큰 목소리에 놀란 듯 주위를 둘러보기도 했다.

“쟤 어때?”

어느새 철기가 벤츠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있었다. 그는 다 알고 있다는 듯 얼굴 한가득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어떠냐니?”

벤츠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너 쟤 좋아하냐?”

철기의 미소가 음흉하게 변했다.

“야 벤츠가 고백한단다!”

철기가 갑작스레 소리 질렀다. 그러자 그늘 밑에 퍼져 있던 반 아이들이 하나둘씩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때 벤츠는 처음으로 철기에게 반항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는 철기를 노려보고 있었다. 철기는 벤츠의 뒷목을 잡아 자리에서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부동자세로 선 두 사람의 눈빛이 날카롭게 부딪쳤다. 철기는 벤츠의 태도에 심기가 몹시 불편했던지 평소보다 더 험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결국, 얼마 안 가 벤츠는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그의 시선이 굴욕적으로 아래를 향한 것이다. 그는 몹시 떨고 있었다. 철기는 벤츠의 귀에 대고 조용하게 속삭였다.

“제대로 안 하면 오늘 밤 터질 줄 알아.”

벤츠는 상기된 얼굴로 여학생들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한 발자국씩 내디딜 때마다 반 아이들은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소년은 그런 벤츠의 모습을 지켜보기가 힘들었다. 이윽고 벤츠가 그녀 앞에 섰을 때, 그는 힘겹게 말을 꺼냈다.

“저, 저기...”

여자아이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보자 벤츠는 더더욱 고개를 내리깔 수밖에 없었다. 그때 벤츠의 뒤를 몰래 따라간 철기가 벤츠의 체육복 바지를 끄집어 내렸다.

“꺅! 미쳤어!”

여자아이들은 소리 지르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벤츠의 하얀 엉덩이골이 햇빛 위로 드러났다. 벤츠는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듯 가만히 서 있었고, 철기를 비롯한 다른 아이들은 바닥을 구르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스피커를 통해 수업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바보같이 벤츠는 그대로 서서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괜찮아?”

하굣길에 소년은 벤츠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미안하다. 도움이 돼주지 못해서......”

벤츠는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그가 갑자기 불만을 토해내듯 소리 질렀다.

“그 자식 노리개는 너 아냐? 난 그저 돈만 제때 바치면 되는 거였는데......”

벤츠의 말을 들은 소년은 한동안 말을 잃었다. 벤츠 또한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집 앞에 거의 도착할 무렵, 벤츠가 먼저 말을 꺼냈다.

“사실 그놈만 없어지면 되는 거잖아. 그렇지?”

“뭐?”

“철기 놈만 없으면 아무 문제 없는 거잖아.”

그렇게 말하는 벤츠의 얼굴은 몹시 상기되어 있었다.

“야.”

“응?”

“너 한 번이라도 맘대로 세상을 움직여본 적 있냐?”

 

소년은 고등학교 첫 등교 날을 기억한다.

“어이!”

우연히도 소년은 등굣길에 철기와 마주쳤다. 철기는 밝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도 열심히 하자.”

철기는 소년에게 그렇게 말했다. 유치하게 들렸지만 진심이 묻어나는 말이었다. 그는 이제 완벽하게 다른 세계로 편입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이제 뒷자리에서 무게를 잡는 녀석이 아니었다. 머리가 커가면서 그런 것은 바보 같은 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명문고 학생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운명의 장난인지 소년과 철기는 고등학교 1학년을 같은 반에 배정받았다.

“철기 형이 서울대 학생이래.”

“그 형 양팔에 문신 장난 아니던데?”

“반전이네, 그 형.”

소년은 몰랐던 사실이었다. 철기가 처음 보여줬던 동경의 눈빛은 어쩌면 형의 영향이었는지도 몰랐다. 철기는 고등학교에 와서도 탁월한 친화력으로 반 아이들과 친해져 갔다. 한동안 그는 무리 없이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는 듯 보였다.

그런데 무언가 중학교 때와는 달랐다. 어쩌면 새롭게 만난 아이들의 성질이 달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고등학교에서는 더 이상 수업 중에 장난을 던지는 아이도, 서로의 힘을 과시하려 싸움을 벌이는 아이들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들 그런 것에 허비할 시간이 없다는 듯, 밤늦게까지 책상에 앉아 자신의 공부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철기는 무언가를 느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소년은 아무리 생각해도 철기의 변화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하필 자신이 그 변화의 희생양으로 선택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어느 날인가 철기가 공부하고 있던 소년의 머리를 툭툭 치면서 장난을 치고 있을 때였다. 가깝게 지내게 되면서 그들은 가벼운 장난 정도는 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때 소년은 그를 제지하는 대신에 그저 잠깐 얼굴을 찡그렸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표정이 철기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씨발, 인상 좀 펴.”

그렇게 말한 후 철기는 소년에게 한동안 말을 걸지 않았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철기는 소년을 조금씩 웃음거리로 만들기 시작했다. 철기의 행동은 마치 중학교 시절의 놀이를 재현하려는 듯 느껴졌다. 철기는 소년의 목을 조르거나 넘어뜨린 뒤 옷을 벗기며 장난을 쳤고 온갖 귀찮은 심부름을 시키기도 했다. 아이들 앞에서 부끄러운 행동을 시킨 뒤 제대로 하지 않으면 구타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년은 한 번도 반항하지 못했다. 철기는 소년에게 여전히 범접할 수 없는 무게감을 지닌 아이였고, 그 때문에 소년은 항상 철기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속에 품고 있었다. 소년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벤츠 또한 부잣집 아이에 덩치가 작다는 이유로 어느새 그들 관계에 말려들게 되었다.

명문고 아이들의 약은 점은 절대로 앞에 나서기는 싫어하면서 은밀하게 그것을 즐기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철기가 장난을 치면 함께 웃고 떠들면서도, 얼마 안 가 그들은 다시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가 책을 펼치곤 했다. 누구 하나 철기의 행동에 동조하거나 반대하는 의견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거리를 두고 지켜보기를 즐기는 관찰자들이었다.

언젠가 철기가 소년의 가방을 창밖으로 던져버린 적이 있었다. 그날은 비가 오는 날이었다. 아무도 소년의 가방의 행방을 말해주는 아이가 없었다. 소년은 수업 시간 내내 가방을 찾기 위해 돌아다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단에서 이미 젖어버린 그의 책과 가방이 발견되었다. 소년은 눈물이 날 정도로 비참한 기분이었다.

그날 오후 집으로 가던 길에 소년은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 철기를 발견했다. 버스는 이제 막 정류장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 소년은 할 수만 있다면 철기를 차도로 밀어버리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겨우 몇 달 사이에 그들의 관계는 예전과 너무나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벤츠가 계획을 실행하기 전날 밤, 소년은 그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넌 그냥 그놈의 주의를 끌기만 하면 돼. 내가 뒤에서 찌를 테니까. 어쩌면 한 방으론 죽지 않을지도 몰라. 그럼 그놈을 묶어놓고 고문하자. 자정까지 실컷 그놈을 괴롭히다가 그놈이 최후의 빛을 보기 전에 숨통을 끊어놓는 거야. 그리고 잠시 후 우린 함께 장렬한 지구의 종말을 맞이하는 거지. 어때? 넌 세상이 끝장날 때까지 그 자식 똘마니로 남고 싶어?”

소년은 벤츠가 반쯤 미쳐있다고 생각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몹시 격앙되어 있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소년은 벤츠가 단순히 자신의 공상을 풀어놓는 것으로 생각했다. 벤츠는 그런 녀석이었다. 언제나 그는 실행할 용기는 없으면서 입으로 떠벌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가 떠벌리는 공상의 내용이 더 잔인하고 기괴한 모습을 띨수록 그는 나약한 현실을 보상받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스스로 도취감에 빠지곤 했다.

소년은 벤츠의 계획에 아무런 동조의 표현도 하지 않았다. 물론 적극적으로 반대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잠자코 벤츠의 말을 듣고 있다가 자신은 모르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소년은 벤츠가 철기에게 처음으로 지어 보인 반항적인 표정을 떠올렸다. 그것은 사실 소년에게 작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벤츠는 미약하게나마 변화라는 것의 가능성을 보였던 것이다.

소년은 자신이 얼마나 비겁한 인간인지 알고 있었다. 그 또한 자신이 경멸했던 명문고의 아이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 채로, 모든 판단을 유보한 채로 그저 모든 것이 스쳐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사람들 속에서 언제나 무채색을 띠기를 바라고 있었다.

‘겁쟁이. 세상은 반드시 멸망할 것이다.’

벤츠는 잠시 후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유치할 정도로 비장해 보이는 단정 형의 어투였다. 그리고 그러한 벤츠의 단정은 적어도 소년에게는 다가올 현실을 예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폐차장, 11시’

막상 예정된 시간이 닥쳐오자, 소년은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보니 그 짧은 문자는 철기의 것을 흉내 낸 것이었다. 철기가 짧은 문자만으로 모든 것을 말하려 했듯이 벤츠도 그 짧은 문자 속에 자신의 은밀한 계획을 담고 싶었던 것 같았다. 시계는 이미 11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소년의 가슴이 충동질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에게 시련을 안겨준 벤츠를 끊임 없이 속으로 욕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무언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공포 때문에 몸이 떨려오기도 했다. 계획을 실행하건 하지 않건 소년은 그 장소로 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소년은 서둘러서 집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밤공기를 한껏 들이쉬자 코가 시려왔다. 폐차장까지는 전속력으로 달리면 15분이면 도착할 거리였다. 그는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밤 거리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다들 집 안에 틀어박힌 채 숨죽이며 열두 시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소년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했다. 막상 폐차장에 도착하더라도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확신이 없었고 그는 자신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조차 잊어버릴 것 같았다.

 

훗날, 언론을 통해 비리가 밝혀진 한 사이비 종교의 여교주가 결국 사지가 잘린 시체로 발견되었을 때, 사람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종교 집회가 열리던 건물 뒤뜰에서 비닐에 온몸이 휘감긴 모양으로 발굴되었다. 매장된 지 몇 달밖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으나, 그녀의 시체는 마치 몇 세기 전의 유물처럼 미라화가 진행 중인 모습이었다. 곧 그녀를 살해한 네 명의 광신도들이 체포되었고, 그들 중 가장 지식인 축에 속했던 한 남자는 기자들의 질문에 고개를 숙인 채 이렇게 대답했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그때 우리는 세기말의 환영에 미쳐 있었다.”

소년은 폐차장 안으로 뛰어 들어가고 있었다. 멀리 가로등 아래에 두 사람의 실루엣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벤츠는 무릎을 꿇고 앉아 철기에게 손을 싹싹 빌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이미 엉망진창으로 터져 있었다. 역시나 계획은 실패한 듯 보였다. 소년의 가슴이 다시 요동치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들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철기는 벤츠의 오리털 파카를 입고 나타난 모습이었다. 그는 벤츠에게 무어라고 소리 지르더니 발길질을 해댔다. 벤츠는 철기에게 얻어맞으며 땅바닥을 굴렀다. 소년이 가까이 다가갈수록 피투성이가 된 벤츠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어쩌면 너무 늦어 버린 지도 몰랐다. 소년이 망설이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다른 결말을 맞이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소년은 어둠 속에서 계속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벤츠는 소년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의 시선이 잠시나마 소년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눈빛으로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보였다.

갑자기 무슨 용기가 생긴 것인지 벤츠가 철기의 몸을 붙잡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벤츠는 철기를 최대한 자신을 향해 붙잡아 두려고 노력했다.

“이 새끼가 독을 품었나?”

철기는 벤츠를 떼어내려고 애를 썼지만 이내 벤츠와 함께 몸을 뒤섞으며 땅을 구르기 시작했다.

소년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벤츠의 칼을 보았다. 미제 서바이벌 나이프였다. 벤츠의 허세와 떠벌림을 대표하는, 그에게 퍽 잘 어울리는 물건이라고 소년은 항상 생각해 왔었다. 소년은 칼을 집어 들고 조심스럽게 가로등 불빛 안으로 스며들어 갔다. 그가 완전히 어둠에서 빠져나오기 전에, 그리고 철기가 그를 발견하기 전에 모든 일은 끝나 있어야 했다.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을까? 내면의 목소리가 고장 난 카세트테이프처럼 한 문장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소년은 칼을 비껴 잡은 채 아주 천천히, 철기의 옆구리에 그것을 박아 넣을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같은 시각, 사이비 종교의 집회 장소는 고요한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커다란 강당 안에 모여 앉아 누구 하나 함부로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의 모습을 생중계하고 있는 방송사의 카메라도, 리포터들도, 숨죽여 종말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도들은 강당의 하얀 슬레이트 천장만 바라보며 어디선가 빛이라도 내려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고 여교주는 의자에 앉아 입으로는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을 계속하고 있었다.

“종말의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있던 여교주가 벌떡 일어나며 그렇게 외쳤다. 그러자 신도들은 울부짖음이 반쯤 뒤섞인 목소리로 그녀에게 호응했다. 그리곤 다시 침묵.

11시 59분, 신도들 틈에서 엄지손가락만 한 나방 한 마리가 천장에 매달린 조명기구를 향해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올랐다. 그것을 본 한 중년 남성 신도는, “나방이 승천하고 있다!” 라고 소리 높여 외쳤다. 그 외침을 들은 신도들이 다시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러나 뜨거운 조명에 부딪힌 나방은 잠시나마 그 주위를 맴돌더니 이내 날개가 불타오르며 바닥으로 추락해버렸다. 사람들은 공중에서부터 바닥까지 떨어지는 나방의 움직임을 그대로 눈으로 좇고 있었다. 나방은 빈 마룻바닥 위에 툭 하고 소리 내며 떨어졌다.

그렇게 모두가 말을 잃은 사이, 어느새 시간은 12시 정각이 되었고 종말이 오기는커녕 세상은 평화롭기만 했다. 여교주는 다시 벌떡 일어나더니 “너희의 기도가 세상을 구원했다!” 라고, 아까보다는 조금 자신 없는 목소리로 신도들을 향해 외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회 현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여교주를 보호하려는 신도들과 그녀를 사기꾼이라 매도하는 신도들이 한바탕 어우러져 몸싸움을 벌였다. 한 여신도는 아직 종말의 꿈에서 깨지 못한 듯 그 난장판 사이에 무방비 상태로 선 채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몸이 무수한 상처로 얼룩진 그녀는 소년의 어머니였다.

 

“씨발.”

철기는 자신의 옆구리에 박힌 칼을 힘껏 뽑아냈다. 칼을 뽑음과 동시에 하얀 오리털들이 몇 가닥 공중에 휘날렸다. 빗나간 칼은 두꺼운 파카를 꿰뚫기도 전에 그 힘을 다해버렸던 것이다. 철기는 이미 바닥에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진 소년의 배를 한 번 걷어찼다. 소년은 고통에 신음하며 배를 부여잡고 웅크렸다. 철기는 파카를 벗어 바닥에 던진 뒤 폐차장 입구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찌질한 새끼들.”

그 한 마디를 남기고 그는 언제나와 같이 어둠 속으로 다시 사라져갔다.

소년과 벤츠는 폐차장 한편에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소년은 코언저리에서 나는 비릿한 피 냄새를 맡았다. 아직도 피 냄새가 나는 걸 보니 결국 종말은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들의 계획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모든 것이 제자리였다.

철기의 말처럼 소년과 벤츠는 찌질한 놈들이었다. 소년은 두더지처럼 햇빛이 드는 땅 위로 나오기를 두려워했다. 그는 햇빛을 보면 견디지 못하고 자꾸만 굴속으로 숨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햇빛을 향해 굴을 파 올라간 이상, 그 안에는 변화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2000년, 여전히 추운 겨울이었다. 소년은 열여덟 살의 첫 날을 맞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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