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회 부대문학상 소설 부문 당선작

1.

문장들은 꾸며주는 단어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거나, 반대로 짧은 몸뚱이에 말하고자 하는 바를 우겨넣고 있었다. 글의 홍수 속에서 그가 건져 올린 짧은 감상이었다. 그는 요 며칠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을 지속했는데 이날은 밤에 누웠지만 선잠에 들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습관적으로 학교의 자유게시판을 열었고, 거기에서 글이 쏟아져 나왔다. 무방비로 휩쓸릴 뻔한 그는 잠시 화면에서 눈을 떼고 가만히 허공을 응시했다. 잠에서 깬 그의 생각은 무의식이 유발한 작은 생각의 조각들에서 제법 불어나 여기저기로 흐르기 시작했다. 우묵한 땅에 물이 고이듯 생각은 대개 이름이 있는 곳에서 웅덩이진다. 그가 지나온 무수한 이름들이 머릿속에 정리가 안 된 채, 흩뿌려진 콩알들처럼 펼쳐져 있었다. 생각의 흐름은 그 무수한 점들을 이으면서도 방향 없이 표류했다. 이윽고 생각의 흐름은 그 형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교통수단의 노선을 눈으로 좇아 읽어가듯 그는 생각의 흐름을 시각적 연상을 이용해 가상으로 좇고 있었다. 밤의 침묵이 그를 충분히 차분하게 했고 눈을 감싸고 있는 어둠은 여전했지만 머릿속의 시야에 펼쳐지는 상황은 어지러웠다. 얼마 뒤 감각과 병치된 생각이 다다른 곳은 기차 노선도였다. 그는 다시 스마트폰을 이용해 ‘동해남부선’을 검색했다. 점과 점이 선으로 연결된 그림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생각이 동해남부선에 이르기 전에 그는 지하철을 타고 가던 기억 속에 있었다. 다양한 역의 이름들. 1호선과 2호선, 2호선과 3호선, 또 3호선과 1호선을 연결하던 환승역, 그리고 지하철과 지상의 기찻길까지 이어주던 역. 머릿속에서 그물망처럼 선들이 교차했고 더 넓게 확장했다. 지하철 1호선에 있는 부전역은 지하철 정거장이기도 하고 지상으로 올라간다면 백 킬로미터가 넘는 기찻길의 출발역이자 종점이기도 했다. 그가 지하철을 이용하여 부전역을 지날 때 동해남부선을 이용할 고객을 위한 안내방송이 어김없이 나왔다. 그는 그 기차 노선의 이름을 꽤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었다. 노선의 반대편 끝까지 기차를 타고 가, 거기에서 다시 내륙 방향으로 이동하는 버스를 이용한다면 그는 대학교를 오기 전까지 줄곧 지내던 고향집으로 갈 수 있었다. 열차와 버스를 몇 번씩 갈아타는 불편함을 감수해야하기 때문에 아직까지 이용한 적은 없었다.

다시 게시판에 접속한 그는 글 사이에 파묻혀 있던 ‘<수요독서모임>에서 신입회원을 모집합니다.’라는 글을 발견했다. 페이지를 두 번 넘긴 후에야 만날 수 있는 분명함이었다. 글은 <수요독서모임>이라는 이름의 독서모임의 운영계획과 인원의 모집에 관한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글쓴이가 밝힌 마감 시한은 벌써 임박해 있었다. 생각지 않게 자신의 취향에 맞는 모임을 찾은 그는 그 글을 읽고 곧장 모임에 지원한다는 취지의 이메일을 작성했다. 

도서관을 끼고 돌아 현관 쪽으로 나있는 길을 지나갈 때, 잡초를 벤 자리에서 쉽게 맡을 수 있는 진한 풀냄새가 풍겨왔다. 담장처럼 길 양 옆으로 자라있는 나무는 여름이 돼 무성해졌다. 습하고 더운 공기가 냄새를 오래 지니고 있어서 그는 숨을 들이쉴 때 냄새를 함께 삼킨 기분이 들었다. 며칠 전 <수요독서모임> 모집 글을 읽고 그는 이메일을 모임의 회장이라고 소개한 사람에게 보냈다. 승낙의 연락을 받은 후 잠깐 면담을 할 수 있겠냐는 회장의 말에 따라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도서관 한편에 붙어 있는 학내 카페 앞에서 그는 회장을 만났다. 글로 먼저 만난 이미지와 실재 회장의 모습은 어긋나는 데가 많았는데 이를 합치는 과정에서 그는 긴장감을 느꼈다. 종합적인 추론에 더해 게시판 글쓴이의 이름이 자기 친구와 같아 여자라고 생각 했는데 회장은 키가 큰 남자였다. 회장은 웃음 띤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간단한 인사 후 회장은 게시판에 적은 내용을 다시 확인 시켜주는 방식으로 모임에 대해 설명을 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눈 후 그는 자신의 취향에 맞는 이름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이지 궁금해 회장에게 물었다.

“모임 이름이 되게 단순하네요?” 

그의 간단한 물음에 회장은 대단히 상세하고 친절하게 대답했다. 회장은 말을 시작하면서 그의 눈치를 살폈고 긍정적인 반응을 받은 듯 이내 미소를 지었다.

<수요독서모임>은 처음에 문학 전공 수업시간에 만난 남학생 두 명이 서로의 관심사가 책이라는 걸 알아차린 데서 시작되었다. 둘은 마침 조별 과제를 함께하게 되었고 서로를 반가워하며 급속도로 사이가 가까워졌다. 그들은 편중되지 않은 독서 습관에 더불어 편중되지 않은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어 다양한 분야의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주고받았다. 하루는 술을 마시다가 자신들이 다니는 넓은 학교에 확률적으로 당연히 그들과 같은 사람들이 더 있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고, 흩어져 있지만 서로를 원하고 있을 그 사람들을 모아보기로 했다. 맨 먼저 형태조차 없는 모임에 틀을 만드는 것은 이름을 짓는 데서 시작되었다. 두 친구는 독서모임의 이름을 생각해 내는 데 많은 노력을 들이진 않았다. 자신들의 빈곤한 상상력은 일상 도처에서 자주 맞닥뜨렸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에게 재치 있는 작명을 기대하진 않았다. 얼마 고민하지 않고서 별안간 모르겠다며 ‘무명(無名)’이라 짓기에 이르렀다. ‘<독서모임, 무명>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라는 제목의 글이 그날 밤 게시판에 등록되었다. 이름을 짓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성격을 어렴풋하게나마 드러낼 수 있다는 점에 그들은 흡족해했다. 학교 자유게시판에 독서모임 홍보에 관한 글을 쓰고 며칠 사이에 기대했던 것처럼 여러 사람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지금의 회장도 그때 연락을 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두 친구의 생각과는 달리 모임의 이름은 모임에 모인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첫 정식 모임에서 앞으로의 방향을 논의하고 세세한 사항을 조율할 때 <무명>이라는 이름이 큰 주제가 됐다. 이름을 지은 두 친구는 모임에 온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별다른 뜻이 없다고 한 뒤, 대신할 이름이 있다면 바꿔도 좋다는 말을 했다. 여기에 나이가 많던 대학원생이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은 그 무명이라는 이름에서 갖가지 의미를 찾아낼 거고 그것이 우리 활동에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요지의 말을 완곡하게 돌려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없어서 그녀는 무명이라는 이름에서 어떤 함의를 찾아냈는지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받았다. 그녀는 ‘반정부 성향의 사람들이 불온서적을 읽는 느낌이 든다.’고 자신의 감상을 밝혔다. 즉 너무나 정치적인 이름이라는 것이었다. 이름이 없을 권리를 박탈당한 사회에서 이름이 없다는 것을 공적인 공간에 선언하는 행위는 대단히 상징적이라고도 했다. 모임에 모인 사람들은 그녀가 왜 처음에 알아듣기 힘들게 돌려 말했는지 금방 이해했다. 시스템에 대한 반발보다 귀찮음이 탄생시킨 이름이었지만 다중에게 노출되면 새로운 의미를 부여 받기도 했다.

이 말을 들은 몇 명의 사람들은 선언이라는 단어가 유발하는 생각들을 떠올려봤다. 어떤 이는 선전, 선동이라는 단어와의 연관성에 주목하기도 했고 또 어떤 이는 제목만 들어 본 「공산당선언」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녀의 의견에 동조한 어떤 사람은 게시된 글에서 모임의 뚜렷한 방향이 설명되지 않은 와중에 ‘책을 읽고 우리 사회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문구에서 묘한 뉘앙스를 포착했다고 한다. ‘사회’라는 단어 때문에 이 모임의 주류를 운동권 학생들이 형성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우려했었다고 그 자리에서 스스럼없이 고백했다.

그의 경우라면, <무명>에서 어떤 정치적 의미도 읽을 수 없었다. 회장은 그가 어이없어 하는 모습을 보고 이런 다양한 생각들이 만난다는 것이 매력적인 거라면서 웃어 보였다.

<무명>의 첫 모임에서 의도치 않게 정치적 논쟁이 촉발되었고 그에 으레 따르기 마련인 피로감 탓에 결국 모인 사람들은 <수요독서모임>이라는 이름을 최종 낙점하게 됐다. 이로써 모든 곳으로 열려 있던 모임의 방향은 일부분 상실되었고, 모임은 구체적인 조직의 형태를 갖게 되었다. 

긴 이야기를 하는 동안 회장은 줄곧 들뜬 표정을 지었다. 회장은 이 모임에 대한 애착이 커서 모임에 관련된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때의 사람들은 다들 나이가 꽤 있어서 지금은 전부 졸업했고, 회장 자신만 남아 인원을 충원하며 지금까지 이어 가고 있다고 했다. 회장은 <수요독서모임>이라는 이름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부족하다고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연락을 준 사람들이라면 이 모임에 어떤 매력을 느꼈을 것이고, 그렇다면 적어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일 것임은 분명하지 않겠냐는 말을 덧붙였다. 

“사실 전 이름을 무척 잘 지었다고 생각해요. 모임의 성격이 명확하게 드러나잖아요?  수요일에 같이 모여서 독서를 한다, 여기에 더 필요한 말이 있을까요?”

이 말에는 그도 동감했다. 반쯤 감은 눈으로 자유게시판을 훑을 때 다양한 제목의 글 속에서  <수요독서모임> 만큼은 눈에 확 들어왔었다. 간결한 이름과 상세하게 밝힌 모임에 대한 설명이 그에게 신뢰감을 줬다.

“네 저도 명확하게 드러나는 이름 좋아해요.” 

그는 처음 만난 자리에서 자기의 이야기를 시시콜콜하게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동해남부선 같은’이라는 말을 첨가하진 않았지만 그날의 밤이 유발한 생각을 그는 다시 떠올리고 있었다. 회장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지만 더 물어보지는 않았다. 잘 알아두겠다는 말을 하고 독서모임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 갔다.

“전 이 중에서도 모임을 제일 강조합니다. 모여야 모임이죠. 그런 점에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성실하게 꾸준히 참석하실 수 있겠냐는 겁니다.”

그는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첫 만남에, <수요독서모임>이 어떤 곳일지 모르는 사람한테 묻기에는 너무 도발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교감이 있기에 앞서 성실부터 강요하는 것이 별로 탐탁지 않았다. 하지만 이 때문에 오히려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다. 이 질문에서 회장의 자신감을 엿봤기 때문이다. 그는 불쾌한 감정을 잠시 누르고 열심히 하겠다는 의미  없는 말로 회장을 안심시켰다.

각자 주말을 이용해 회장과의 대면을 갖고 첫 공식 일정에 모인 사람은 열 명이었다. 처음에는 모인 이들끼리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하는 와중이라 묘한 긴장감이 감돌기도 했다. 회장은 미리 모든 사람을 만나봤기 때문에 자연스러우면서도 부드럽게 분위기를 이끌어갈 수 있었다. 모임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다시 설명하고 세부적 사항을 모임에 온 사람들과 조율하기 시작했다. 첫날은 모인 사람들에게 발표를 어떻게 하면 되는지를 직접 보여주기 위해 회장이 경제학에 관한 책을 골라 이를 사회 현안과 연관시킨 토론 주제를 들고 왔다.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경제학에서 다루는 다양한 지표를 분석할 줄 알아야 합니다. 통계치 중 흥미로운 것으로 평균값과 대푯값이 있는데…….”

그는 회장의 발표에 흥미를 갖지 못했다. 자기가 아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난 이야기가 아니라고 판단하자 금방 딴청을 피웠다. 그의 관점에서는 식상한 이야기를 마치 가르치려 드는 듯해서 조금 거북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는 발표문의 여백에 낙서를 하다 굵은 글씨체로 적힌 ‘대표값’을 발견하고 속으로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대푯값을 작은 소리로 읽어 봤다. 몇 번을 되뇌며 [대푣깝]으로도 [대표깝]으로도 발음을 한 뒤, 그는 스마트폰으로 맞춤법에 따라 대푯값이 올바르다는 것을 확인하고 보일 듯 말 듯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회장은 첫 모임이기 때문에 속도를 내 예정 시간보다 빨리 일정을 마쳤다. 주섬주섬 가방을 싼 회장은 말을 이어나갔다. 

“뜻깊은 첫 모임을 마쳤으니 술을 마시러 가야죠? 수요독서모임은 줄여서 수모임, 술모임이기도 하니까요.” 

장난스러운 회장의 말에 모두 동감하는 미소를 보였다.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것을 다들 좋아하는 눈치다.

“학교 앞 ‘아지트’로 갑시다. 거기 안주가 싸면서도 맛있거든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술을 마시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다. 학기가 막 시작되었다는 것이 부담됐다. 더구나 술자리에도 흥미 없는 이야기가 계속될지 몰라 흥이 별로 나지 않았다. 첫 모임에 대한 그의 느낌은 기대했던 것보다 실망스러웠다. 

술을 마시면서 회장은 자기가 모임을 좋아하는 정도가 여러분들의 생각 이상일 거라며 애정을 여과하지 않고 드러냈다. 처음 모임에 들었을 때 지금보다 어렸던 회장의 눈에는 모임이 완벽하게 보였다. 모임에 온 사람들은 각자 개성이 뚜렷했지만, 그들이 한데 모여 이루어내는 융화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회장은 지금은 졸업한 그 사람들이 모두 잘돼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왕 모임에 들었으면 같이 잘해보자는 말을 하면서 회장은 <수요독서모임>을 지금보다 키울 욕심을 사람들에게 드러냈다. 술기운과 더불어 회장은 훨씬 들떠 있었다. 그는 이런 회장의 말이 과장됐다고 생각해 회장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쁜 뜻에서 하는 말은 아니라고 되도록 좋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회장의 가벼운 말은 오히려 회장이 정말로 독서모임을 좋아함을 느낄 수 있게 하기도 했다. 그는 문득 자신이 무엇을 좋아해본 지가 꽤 오래됐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것을 좋아한다는 건 결국 우연이라는 요소가 개입하여 어떤 것을 좋아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야 가능한데 그의 일상은 이런 우연적 상황을 최소화시키는 방향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와 같은 행동방식이 자신의 여건에 맞는 좋은 방안이라 여겼다. 예측 가능한 생활은 위험을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방어적 수단이었으며 그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제법 심심함을 느끼기도 했다. 일탈의 욕구가 강해지면 도서관에 갔다. 그는 소설책을 주로 읽었는데 소설의 내용과는 별개로 아름다운 제목을 마주하면 그 자체로도 많은 위안을 얻었다. 머릿속에 흩뿌려진 작은 콩알들과는 달리 아름다운 소설 제목들은 ‘잭과 콩나무’의 콩알이었으며, 자라면 하늘까지 닿을 그 콩알들을 그는 고이 모아 두고 있었다.「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제목도 그 중 하나였는데, 앞에 몇 장을 읽다 그만둔 소설이었다. 그 소설이 우연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는 다음날 도서관에 가서 그 책을 빌렸다.

모임을 진행하면서 회원들끼리는 친해졌다. 모임 밖에서도 자주 만났고 책과 상관없는 일로도 시간을 함께 보냈다. 회장은 친해지는 와중에도 사람들에게 격식을 차리는 경우가 많았다. 말을 할 때도 항상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히 드러나도록 노력했다. 말끝을 흐리는 법도 잘 없었다. 그러면서 자기가 추구하는 방향에 대한 메시지를 꾸준하게 노출시켰다.

모임을 진행하며 회장은 머릿속에 담아 뒀던 자신의 계획을 점차 공개했다. <수요독서모임>을 키우고 싶다는 목표는 자주 밝혔지만 그 방향은 줄곧 불명확했었다. 회장은 우선 <수요독서모임>을 학내 정식 학술동아리로 등록해 거기에 딸려 오는 지원금을 타낼 계획이었다. 또한 외부에서 시행하는 각종 공모전에 <수요독서모임>의 이름을 달고 참가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것은 모임의 사람들 중 관심 있는 이들만 따로 모아 진행하길 희망했다. 강제성은 없지만 스펙에 상당한 도움이 될 거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지나가는 말로 회장은 자신이 독서모임 외적으로도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임의 사람들한테 자주 언급했다. 회장은 막연하긴 하지만 지역 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잇는 ‘인적네트워크’를 구성하고자 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 꿈을 위한 활동이라고 아직 밝힐 수 없어 회장은 무슨 활동을 하는지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회장 스스로도 그건 아직 먼 미래의 일이란 것을 알았고 정확하게 어떤 형태를 띠게 될지 본인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임의 사람들 중 대부분은 당장 내년에 무엇을 할지도 정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회장은 모임에서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회장이 추진하는 계획의 밑바탕에는 <수요독서모임>이 깔려 있었다. 훗날 어떤 사람이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회장은 특별함을 갈구했다. 자신의 이력이 단순한 경력의 나열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흥미롭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되길 바랐다. 회장이 생각하는 자신의 ‘이야기’의 첫 시작점은 <수요독서모임>이었다.

회장은 <수요독서모임> 안의 사람들 의사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회장은 그들에게 부담이 될 만한 어떤 요청도 하지 않았고 혼자서 모든 일을 해왔다. 회장의 계획을 일부 알게 되면서 어떤 사람들은 부담감을 느꼈다. 그럼에도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는 심산으로 대부분 가만히 있었다. 스펙이란 말에 반응한 사람들은 회장의 일에 적극 가담하기도 했다. 

그의 경우, 이 모임에서 회장의 방향에 가장 부담감을 느낀 사람이었다. 애초에 마음 맞는 사람들과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서 온 곳이었는데 점점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 컸다. 그의 세상은 이처럼 단순한데 모임은 그렇지 않았다. 모임에서 회장과 그를 적극성이라는 성향에 따라 일직선상에 놓는다면 서로가 양 극단을 차지할 것이다. 그 양 극단 사이에 모임의 나머지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비슷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임에 들었지만 벌써 걷는 속도는 그 안에서도 제각기 달랐다. 

이런 상황에서 모임이 유지되려면 분명히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앞서 가는 사람이 걸음을 늦추는 것. 그렇지 않다면 뒤쳐지는 사람이 떨어져 나갈 일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답은 이미 나와 있으며 그 답에 대응하여 자신이 취해야 할 행동을 결정하는 일만 남았을 뿐이라는 자못 비장한 생각을 했다. 당시의 그는 회장을 <수요독서모임>과 동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때 자기 스스로에게 했던 물음과 대답들을 그는 한학기가 끝난, 눈이 많이 내린 겨울이 돼서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겨울의 그는 과거의 그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전할 수 없어 무척 아쉬웠다. 당시 그가 떠올린 생각은 결국, 회장의 생각도 그의 생각도 집단의 평균에는 한참이나 멀게 자리하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는 것을 아느냐고. 겨울의 그는 자기 앞에 펼쳐졌던 삶을 하나의 판으로 인식해 복기할 수 있었는데, 당시의 그는 속으로 [평균깝]과 [대푣깝]을 두 번 되뇌었을 뿐이다.

▲ 일러스트 권나영

2.

우주 속 둥실 떠있는 공간에서 물체는 별을 만나지 않는다면 한번 추진된 힘으로 영원히 움직일 수 있겠지만 지구에서는 중력 때문에 모든 추진된 물체에 마찰력이 생겨 멈추고 만다. 사람보다 중력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사람이 ‘사회적인 동물’인 이유도 결국 중력의 영향을 받아서일 가능성이 크다. 지구에 산다는 것은 자기가 동그란 구체 위에 몇 도 정도 기울어진 상태로 서 있다는 것도 잊을 만큼 지구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사람이 생겨난 뒤 만들어진 집단이니 사회니 폴리스니 조직이니 국가니 하는 것들도 전부 중력을 닮아서 그런 것이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서로를 끌어당기게 태어난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원리지만 분명 존재하는 중력의 특성과 대단히 닮았다. 그리하여 필연적으로 외따로 떨어질 수 없고, 서로를 본능적으로 끌어당겨 집단을 형성하여 지낼 수밖에 없는 지구 위의 사람들이라면 그 안에서 마찰력을 받게 된다. 

결국 학교 안에서, 학기가 시작된 지 몇 달이 지나고 그 사이에 시험을 한번 치른 학생들이 지치는 것은 과학법칙으로도 당연한 일이었다. 학교라는 체제 안에 머문다는 자체가 힘든 일이고 그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지내는 것도 학생들은 힘에 부친다. <수요독서모임>에서는 새로운 추진력을 얻기 위해 소풍을 준비했다.

“근데 그 산을 간다면 어디에서 내려와요?”

“당연히 정상까지 가야죠. 봉우리 이름이 뭐였더라, 지금 생각은 안 나는데 거기 오르면 경치가 정말 좋습니다. 정상까지 가지 않는다면 산을 올랐다고 할 수 없죠.”

이날 발표를 맡은 사람이 준비를 너무 부실하게 해와서 10분 만에 준비해 온 발표를 끝낸 것도, 발표를 듣고 사람들이 유독 이야기에 흥미를 갖지 못한 것도 다 추진력이 떨어진 탓으로 돌릴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임의 사람들은 모두 새로움을 바랐다. 젊음은 길을 잘못 들어 돌아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연료의 소진도 빠르다. 그래서 모임의 사람들은 근교의 산을 오르기로 했다. 그들은 몸을 움직여 활기를 되찾을 셈이었다. 운동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자기 관절에서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난다는 것은 뭔가 잘못돼가는 징조임에 틀림없다는 불안감에, 운동은 싫지만 건강을 생각한다면 산을 올라야 한다고 덜컥 승낙했다. 그들은 몸이 보내는 신호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정상은 고도 천 미터가 넘었고 쉽다고 할 수 없는 코스였다. 주변에 만만한 산을 두고 하필 그 산을, 그리고 정상등정을 떠올린 사람은 회장이었다. 운동을 싫어하는 어린 여학생은 정상까지 오른다는 회장의 말을 듣고 좀 싫은 내색이었지만 크게 반박할 내용도 아니었다. 산을 올라 중턱의 어느 이름 없는 길에서 돌아 내려온다면 매우 찝찝할 거라는 생각은 그녀도 했기 때문이다. 

“저도 사실 이야기만 들었지 가보지는 않았는데, 하려면 제대로 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천 미터는 넘어야 산이죠.”

회장은 흩어지기 쉬운 사람들을 모아 다독이듯 가볍게 말했다. 그러면서 자기 스스로도 그 말에서 힘을 받고 있었다. 한편, 그의 경우에는 모두 함께 올라가서 함께 내려온다는 회장의 말이 유독 웅변조로 들린 것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는 예민하게 회장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전부 반응했다. 마치 사람들이 불쑥불쑥 뛰어드는 학교 앞 도로에서 차를 모는 운전자처럼 긴장하고 있는 것이 그를 피곤하게 했다. 피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회장은 불쑥 길을 가로막고 차를 세운 뒤, 창문을 똑똑거렸다. 그래서 그는 많이 지쳐 있었다. 그는 이번 산행 계획을 유달리 반겼다. 자신의 과거 산행 기억을 떠올려보면 산은 같이 가더라도 홀로 걷는 것이었다. 관절이 삐거덕거리는 소리는 스무 살을 한참 전에 지난 그에게서도 들렸고 몸이 보내는 신호에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는 친구에게서 등산화랑 비와 바람을 막아주는 소재의 등산복을 빌렸다. 등산복은 조금 펑퍼짐했지만 신발은 그에게 딱 맞았다. 준비는 차질 없이 진행됐다. 하지만 산행을 가기로 한 전날, 회장은 비가 올 거라는 일기예보를 들며 산행 계획을 취소했다. 처음부터 산에 가는 걸 안 내켜한 사람들은 아쉬워하면서도 이 소식을 은근히 반겼다. 일기예보 상으로 주말 강수확률은 칠십 퍼센트였는데, 주말이 지나는 동안 흐린 날씨만 지속되었고 끝내 비는 오지 않았다. 그는 언제부턴가 회장이 학술동아리 계획서를 만들고 대외적으로 바쁜 활동을 이어가면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고 앓는 소리를 내던 걸 떠올렸다. 그가 회장에게 그렇게 바쁜데 산에 갈 수 있겠냐고 물었을 때 회장은 ‘망중한’을 즐겨보고 싶다고 하면서 어색하게 웃어 보였었다. 하지만 결국 가는 날이 다가오자 가기가 부담되어서 취소한 것이 틀림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회장은 후에 미안하다면서 다음번에는 훨씬 큰 산을 제대로 계획 세워서 가자고 말했다. 

회장의 행동은 그가 마침내 <수요독서모임>은 책을 읽는 곳이라는 결론을 내린 뒤에야 참을 만해졌다. <수요독서모임>이 책을 읽는 곳이라면, 그는 산행 취소와 같은 일은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는 도서관에 가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다시 집어 들었다. 도서관에 오기 전에도 그는 생각날 때마다 몇 번이고 그 소설의 내용을 곱씹어 봤으며 그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받았다. 그는 우연에 대해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고 그것은 그가 책을 읽을 때 느꼈던 강렬한 체험에서 비롯됐다. 생각의 연상 작용이 끝없이 이어져 저 아래 잠겨 있던 과거의 생각들이 불쑥 솟아나 현재의 생각과 연결돼 불어나는 걸 자주 겪었다. 그는 책을 읽으면서 무의식의 존재라던가 의식의 흐름이라던가 하는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밀란 쿤데라의「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우연이 가진 주술적 힘을 믿다.’ 라는 제목의 발표문을 작성하면서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겪었던 강렬한 경험을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발표는 앞선 사람들의 차례가 다 지워지고 그에게로 곧장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회장의 관점에서는 그날은 여느 발표날과 다름없는 날이었다. 최근 들어 회원들이 지친 모습을 보였고 계획했던 산행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마침 우연히도 회장의 지인이 좋은 연극을 올리고 있었다. ‘인적네트워크’를 구성한다고 다양한 방면의 사람과 교류를 넓힌 결실을 수확할 수 있게 됐다고 회장은 기뻐했다. 

회장의 이 같은 결정으로 그는 자신이 바보가 된 기분이 들었다. 남의 행동이나 생각에 쉽게 동요한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확신이 그만큼 부족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는 <수요독서모임>에 대한 믿음을 잃고 있었다. 처음 모임에 참가하고 싶다는 의사의 이메일을 보낼 당시의 그는 <수요독서모임>을 좋아하려는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지금의 그는 <수요독서모임>을 좋아할 수 있을지를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맞이할 이 모임의 끝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연극은 한국에서만 네 번의 정상 등정이 이루어진 후의 에베레스트에, 또다시 도전한 원정대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는 혹독한 환경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연극 무대에 올린다는 것 자체가 어색하게 보였다. 피로가 극에 달해 대원들은 서로에게 할 말을 잃어갔다. 하얀 설산에 이따금 무서운 바람이 몰아치고 대원들을 묶어주던 자일은 서로를 잃어버릴 수 있을 만큼 느슨해졌다. 그들은 함께였지만 서로를 돌봐주기에는 산이 너무나 험준했다. 결국 대원들은 홀로 조금씩 전진했다. 그들은 설산의 희박한 공기 속에서 자신의 내면 깊숙이 빠져들고 있었다. 그들을 따라, 연극을 관람하던 그도 점차 고독해졌으며 마침내 고요해졌다.  연극이 끝났다. 무대 위에 올라오는 배우들의 모습은 모두 행복해 보였다. 그는 문득 독서 모임을 조만간 나가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는 오래 지체하지 않고 회장에게 자신이 모임을 나올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회장이 추구하는 방향이 자기와 맞지 않다는 이유는 생각만 한 채 말하지 않았다. 회장은 크게 이유를 물어보지 않고 혼자 잠시 생각에 잠겼다. 회장은 그의 단호한 표정에서 설득을 하더라도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회장은 좋음을 강요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회장은 정 나가겠다면 어쩔 수 없는데 활동계획서를 제출할 때 그의 이름을 빼서 수정하기 곤란하니 형식상으로만 회원으로 남아줄 수 있겠냐는 부탁을 했다. 그는 미안한 마음이 컸기 때문에 흔쾌히 승낙했다. 이로써 자신의 죄책감을 조금 덜자는 심산이었다. 그의 생각보다 허무하게 이야기는 끝이 났다. 용건이 끝나자 회장은 일이 있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그가 <수요독서모임>을 안에서 볼 때는 잡을 수 있고 눈에 보이는 듯한 형체를 느꼈었다. 하지만 모임을 벗어나자 그 형체가 환영처럼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회장이 떠나는 뒷모습이 그의 눈에는 왠지 작고 초라하게 보였다. 그는 환영처럼 형체도 없이 사라질 대상 말고 자신의 온 열정을 쏟아서 좋아할 가치가 있는 진정한 무엇인가를 찾길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 예측 가능한 생활에서 벗어나 얼마든지 우연의 파도 속으로 몸을 던질 준비도 돼 있었다. 

그는 모임을 나온 뒤 친하게 지내던 몇 명에게는 따로 연락을 했다. 모두들 아쉽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도 않았다. 따로 식사 약속을 잡기도 했고 근처에서 수업을 들을 때는 만나서 음료수를 마시기도 했다. 얼마가 지난 뒤 그는 모임에서 자기와 같은 나이라서 제법 친한 사람과 음료수를 마셨다. 그 친구는 자판기에서 그의 것까지 뽑아 건네며 모임에서 한 사람이 사고로 앞니가 전부 부러진 이야기를 전해줬다. 초겨울에 접어들어 바람이 쌀쌀한 무렵이었다.

그가 나간 뒤 모임은 발표 순서를 수정하였고, 새로운 인원을 충원할지를 논의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회장이 술을 한 잔 하자는 제안을 했다. 회장은 지금까지 바쁘게 계획서를 쓰고 대외 활동을 했기 때문에 한동안 좋아하던 술자리도 참석하지 못했었다. 노력의 결과 학교 측에 계획서 기안을 제출한 상태였다. 최종 승인은 나지 않았지만 백 퍼센트 된다는 확신을 회장은 갖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술을 마실 수 있었다. 술자리에서 여러 이야기가 정리되지 않은 채 쏟아졌다. 학점이 낮은데 취업을 할 수 있을까, 용돈 받아서 쓰는 처지에 만날 술을 마셔도 되는 걸까, 애인과 싸웠다는 고민, 책 이야기, <수요독서모임>이야기, 군대 이야기, ‘그’에 관한 이야기, 회장에 대한 이야기, 또 애인 이야기. 그러는 사이 모임에서 항상 조용하던 남학생이 술을 이기지 못하고 바람을 쐬러 나갔다. 이를 본 사람은 두 명 있었지만 그들도 신경 쓰지 않았다. 모임의 사람들이 유독 들뜬 날이었다. 하지만 일부가 다른 약속이 있다면서 먼저 자리를 뜨는 바람에 빈자리가 늘어나면서 흥이 깨졌다. 아까 바람을 쐬러 나간 사람의 스마트폰으로는 메시지가 계속 왔다. 술자리에 남은 이들에게 바람을 쐬러 나간 사람의 부재가 약속이 있다며 자리를 뜬 이들의 빈자리를 합친 만큼 갑자기 크게 느껴졌다. 어디 갔지? 화장실 갔나? 생각하다 술집에서 나와 거리를 둘러봤지만 남학생은 보이지 않았다. 폰 두고 멀리 가지는 않았을 텐데. 걔 술 많이 마셨던가? 모르겠네요. 늦게 와서 술을 많이 부어준 것 때문에 그런가. 시간은 자정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얼마 없었지만 각 술집마다 술에 취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가게 밖에까지 크게 들려 소란스러웠다.

그에게 이야기를 전해주면서 친구는 자기는 약속이 있어 먼저 나왔기 때문에 직접 보진 못했다는 말을 재차 강조했다.

“누군가가 취한 걔를 때리고 간 게 분명한데 그 후로 경찰에서 수사를 벌여도 범인을 못 잡았대. 걔도 범인 얼굴 기억 못하고, 본 사람도 없고. 경찰이 무슨 수로 찾을 수 있겠어? 누구 탓도 못하고 다친 애만 불쌍하지.”

바람을 쐬러 나간 남학생은 어느 건물의 뒷문을 열고 나와 우측으로 꺾어 고깃집에서 숯불을 쌓아 두는 골목길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술을 마시던 회원들이 그를 발견하기 전에 길을 지나던 사람이 먼저 발견해 경찰차가 와 있었다. 그는 그때까지 ‘억, 억’ 소리를 내며 몸을 가누지 못했다. 왜 말도 없이 바람을 쐬러 나와선 이런 후미진 데까지 왔는지 알 수 없는 그들도 눈앞의 충격적인 모습 때문에 쓰러져 있는 남학생을 타박할 수 없었다. 다친 남학생은 경찰의 도움을 받아 병원으로 후송되었고 최초목격자와 회장은 경찰차에 따라 올랐다. 남은 사람들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헤어져 각자 집으로 갔다.

이후 다친 남학생은 치료의 목적으로 고향집에 얼마간 가 있게 됐다. 모임의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무거웠다.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모임을 그만두고 싶어 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하지만 한 명이 나간다면 다른 사람들도 따라 연쇄적으로 나갈 수 있다는 부담감 때문에 서로 눈치만 보는 실정이었다. 회장의 경우 일의 경과를 회원들에게 상세히 알렸고 사건이 어떻게 처리되어 가는 지를 꾸준히 파악했다. 병원을 방문하기도 했고 다친 남학생의 부모님에게 사과를 드리기도 했다. 회장은 끝까지 책임 있는 행동을 이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지도교수의 서명이 들어간 활동계획서 최종본을 학교 측에 제출한다면 정식 승인을 받을 수 있다는 통보를 받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회장은 정식 등록을 포기했다.

그는 나중에 이 소식을 듣고 결국 모임을 없애버린 셈이 된 익명의 폭행자를 떠올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름을 몰랐기 때문에 그는 아무 것도 상상할 수 없었다.

회장의 행동은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 물어보지 않았지만 궁금증을 자아냈다. 법학을 전공한 한 사람은 ‘상당인과관계설’을 떠올렸고 어떤 이는 도의적 책임을 떠올리며 회장의 행동을 이해하려 했지만 그런 노력들로 당시 회장이 생각했던 바를 옳게 파악할 수 있던 건 아니었다. 그들은 회장의 의도를 막연하게 추측할 뿐이었다. 어떤 사람은 회장의 모습에서 연민을 느끼기도 했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에 대한 짧은 감상에 불과했다. 다들 속으로 <수요독서모임>은 회장의 사유 집단이라고 생각한지도 모른다. 그래서 모임의 처음과 끝은 회장에게 전적으로 달려 있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회장이 추진 동력을 잃었을 때, <수요독서모임>의 와해는 필연적이었다. 회장이 등록을 포기했을 때 아쉬움을 가졌던 사람들은 활동비 때문인 게 컸다. 하지만 누구도 활동비에 대해 노골적으로 욕심을 드러내진 않았다. 그들은 전부 학생이었고, 어차피 거저 생길 돈에 불과했다.

그는 회장의 행동을 다른 사람들과는 또 다르게 이해했다. 적어도 회장은 앞니를 부러뜨린 이름 모를 사람보다는 명확하게 존재했다. 따라서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의 생각이 다다른 곳은 회장도 지구 위의 사람이고, 결국 학생이라는 것이었다. 회장은 아마 지친 상태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로 학기가 끝나고 방학이 시작됐다. 그동안 그는 회장을 몇 번 봤다. 하루는 도서관 열람실에서, 전공 책이나 영어 교재를 너저분하게 펼치고 거기에 머리를 박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책 한 권만 꺼내놓고 읽고 있는 회장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회장에게 격려의 한마디, 따뜻한 캔커피 하나라도 건넬까 싶었지만 이내 말았다. 회장을 부른다면 그 다음 무슨 말을 이어가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다음번은 서로가 더욱 멀리 떨어진 상태였다. 그는 기차를 타고 가면서 자유게시판을 살피다 회장이 올린 글을 보게 됐는데 자기가 일하고 있는 책카페에서 아르바이트생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경제학과/김연주 라는 글쓴이는 많은 글 사이에서도 그의 눈에 금방 띄었다. 그는 이때 동해남부선 위에 있었다. 고향 집에 가는데 문득 기차를 타고 싶어졌고, 그 생각이 들자 기차 시간도 알아보지 않은 채 바로 역으로 향했던 것이다.

부전에서 출발하여 바다를 인접해 운행한 기차가 당도하는 곳은 포항이다. 기차는 147킬로미터의 긴 여정을 하면서 여러 역을 지나간다. 그는 기차가 멈춰 설 때, 정차한 역의 이름을 기억했고, 이제는 그냥 지나치게 된 폐쇄된 역들의 이름에도 전부 눈길을 뒀다. 거길 지나가면서 본 작은 풍경들을 하나하나 살피고 기억에 담았다. 그는 어떤 지역을 방문할 때 그 지역을 얼마나 속속들이 다녀야 비로소 그 지역을 여행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기차 안에서 그는 창밖의 풍경을 정답게 바라봤다.

‘그렇다면.’ 생각을 잠시 멈춘 그는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포항역에 도착하면 그는 기차에서 내려 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 내륙 방향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가 가는 땅은 산이 깊어지는 곳이며, 예부터 나무가 유독 푸르기로 유명했다. 그는 집으로 가는 동안 독서모임에서 너무 쉽게 나온 것은 아닌지를 계속해서 되물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나 참을 수 없게 만들었는지는 지금에 와서는 흐릿했다. 그의 생각은 집에 가는 동안 <수요독서모임>이라는 이름에 깊게 고여 있었고, 흘러넘친 생각은 방향도 없이 이리저리 표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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