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에 처한 자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다. 홀로, 외로이. 이즈음의 극장가는 이 단순한 서사에 매료된 듯하다. 평단과 관객의 지지를 아우른 <그래비티>와 <올 이즈 로스트>는 우주와 바다라는 배경 외엔 도드라진 차이를 찾기 힘들다.구원은 오직 스스로에게 달렸다는 듯 이 영화들은 공히 위급에 처한 핵심 인물 한명에만 집중한다. 조력자는 일찌감치 배제되거나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야기는 거의 한 줄로 요약 가능할만큼 간결한데, 그 불가항력적인 고난과 처절한 고투는 총력을 다해 사실적으로 구현해 낸다.
 

스펙터클과 그에 비례한 추체험은 최초의 영화로 기록된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 해프닝이 그랬듯 새로운‘ 전략’이 아니다. 방점은‘ 한 명’에 찍혀야 한다. 이전의 <베리드>나 <127시간>도 그랬듯‘ 1인 생존 영화’의 흥행 이면에는 신자유주의의 가공할 악력에 이제 살아남는 일만이 유일한 관심이 된 우리 시대의 초상이 담겨 있는 게 아닐까. 실은 그것조차도 몹시 버거운 일이어서 스크린의 그들처럼 가히 사투를 벌여야 하는데, 도울 이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들 영화가 시각화에 성공한 공포의 최대치는 ‘혼자라는 공포’다.각자의 고통은 각자의 몫이라는 냉소적 진실이 위력을 발하며 널리 유통되고, 생존 투쟁조차 죄다 파편화된 공포스런 현실이 거기 담겨있다.

살기 위해 싸워야 했던 이들이 있었다. 위성 파편이 가공할 속도로 덮쳐오는 우주 공간이나 오직 구멍 난 요트뿐인 악천후의 망망대해보다 결코 더하지 않은 조건에서 그들은 버텼다. 크레인이거나 송전탑이었고, 철탑 아니면 성당 종탑 위에서‘ 생존’을 도모해야 했던 이들은 말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쳐다봐주지도 않는다.” 막대한 퇴거 강제금과 손해배상 청구액, 체포 영장, 해고나 징계통보서보다 이들을 절망시킨 건‘ 혼자라는 공포’였으리라. 그들이 ‘하늘의 사투’를 벌인 지 도합 978일이 흘렀음에도 ‘열사’는 계속해서 생겨나고 노조 조직률은 OECD 가입국 중 최저 수준인 10%대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이제 또다시, 굴다리에서 내려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노조지회장이 고속도로 한 켠의 대형 광고판에 올랐다.
 

더 이상 고공 농성에 충격받지 않는 사회는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필요가 없어졌거나 ‘타인의 고통’에 무감하도록 철저히 원자화되었거나. 전자는 아직 오지 않은 먼 미래이고 후자는 그 조짐이 여실히 감지되는‘ 공포 사회’다. 그들의 싸움이 그들만의 싸움이어도 좋은가. 법외노조화를 통보받은 전교조나 해산심판이 진행 중인 통합진보당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권력과 자본에 목줄이 죄어 생존을 위협받는‘ 너’를 구하는 일은 결국‘ 나’를 구하는 일이다.“ 그들이 처음 공산주의자들에게 왔을 때,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침묵했다./ 이어서 그들이 유대인들을 잡으러 왔을 때,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침묵했다./ 이어서 그들이 사회주의자들을 잡으러 왔을 때,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기에 침묵했다./ 이어서 그들이 카톨릭 교도들을 잡으러 왔을 때, 나는 기독교인이므로 침묵했다./ 이어서 그들이 내게 왔을 때 그때는 더 이상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마르틴 니묄러의 시를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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