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기사가 다른 사람에게 ‘독’이 될 때는 심적으로 정말 힘들다. 나에게 이 독은 신문사에 피해를 줄 때와 취재원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칠 때로 나눠진다. 얼마 전 이 두 독이 이틀에 연달아 일어난 적이 있었다. 첫 번째 독은 사실관계 확인을 제대로 하지 못해 생긴 메아리 오보였다. 내 잘못으로 우리 신문에 정정보도가 실리는 것이 너무나 싫었다. 기사로도 부족한 우리신문에 괜한 공간이 낭비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다음날에는 더 큰 시련이 다가왔다. 내가 쓴 기사가 대학본부에 잘못된 의도로 전달돼, 취재원이었던 강사님이 곤란을 겪은 것이다. 그야말로 ‘설상가상’이었다.

계속해서 겹치는 악재에 글을 쓰는 것 자체에 회의감이 들었다. 고등학교 시절 기자가 돼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응어리’를 풀어버리겠다는 패기도 꺾여버리는 듯했다. ‘누구를 위해 글을 쓰고 있나’에서 시작한 생각들은‘ 기자’라는 이름조차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비관적인 마음은 사람의 정신을 썩게 만들었다. 특히나 애정이 깊은 일에 그런 일이 생기면 고통은 배가 된다는 것도 이때 알게 됐다. 심지어 기획 회의를 할 때도 무슨 기사를 써야 할지 몰라 겁에 질리기도 했다.

하지만 신문사에서 겪었던 고통스러운 일들을 속 시원하게 해결해주는 곳도 결국 신문사였다. 비정상적으로 비관적이었던 마음은 선배들과 동기들의 위로로 회복됐다. 사람들에게 들었던 말들을 밤새 마음속으로 되새겼다. 복잡한 마음속에 ‘나 만큼 연달아 고통을 맞본 사람이 있겠나’싶기도 했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누군가에게 ‘아 저런 선배도 있었으니까 나도 괜찮다’라는 위안이 되고 싶다. 이런 복잡한 생각의 끄트머리에는 ‘저만한 애가 없다’라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욕심은 욕심을 부르고 나의 욕심은 신문사 생활에 긍정적인 에너지로 터져 나올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젠 정신은 차려졌다. 마치 화생방에서 엄청난 고통을 맛보고 나온 기분이다. 신문사 활동에 대한 미래의 공기는 여전히 맑다. 과거 ‘내가 알리지 않으면 정보는 항상 어딘가에 응어리져있다’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앞으로 나는 정리되지 않고 뭉쳐만 있는 사안들을 하나 둘 파헤쳐 나갈 것이다. 내가 풀 모든 응어리들이 밝혀지기 전까지 나의 상태는 언제나 ‘긍정적 희붐’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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