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과 <아리랑>, <한강>을 쓴 작가 조정래는 올해로 탄생 70주년을 맞았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그는 태백산맥에서 아리랑, 한강으로 이어지는 세 편의 대하소설을 집필하는데 꼬박 20년을 보냈다. 이미 그의 대하소설 삼부작은 1,300만 부가 넘게 팔렸지만 칠순의 나이가 무색하게 올해 발표한 <정글만리>도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그 저력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조정래 소설의 힘의 원동력은 ‘진실의 힘’이다. 그의 작품은 언제나 인간세계의 보편적인 진실에 다가선다. 빨치산도 흡혈귀나 악마가 아니라 똑같은 인간이라는 단순한 진실.

그러나 진실을 아는 것을 넘어 말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역사와 문명을 초월해, 진실을 숨기려는 시도는 민중을 억압해 그들의 권력과 이권을 유지하려는 기득권에 의해 늘 일어났다. 중세 유럽의 타락한 성직자들은 면죄부로 그들의 신성을 곡해하고 무지한 사람들을 속였다. 도덕적 타락과 무지가 진실을 가린 것이다.

왜곡과 무지만 넘어서면 진실에 다가설 수 있을까. 아니다. 때로는 사람들이 진실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사실이라고 알려진 것을 넘어 진실에 다가서는 과정은 때로는 불편함을 넘어 괴롭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진실에 다가선다는 것은 때로는 괴롭다. ‘진실’이라고 믿어왔던 것들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을 목격하는 것은 지금까지 삶 자체를 부정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실은 종종 금기가 되곤 한다. 진실이란 누구나 알지만 아무나 말할 수는 없는 것이기도 하다. 진실을 말하려거나 알려고 하는 사람에겐 집요한 방해와 가차 없는 응징이 있어왔다. 조정래도 ‘빨치산도 인간’이라는 단순한 진실을 묘사했다는 이유로 무려 10여 년에 걸쳐 협박 전화와 법적인 고초를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그의 불편함은 결국 세상을 바꿨고, 지금은 누구도 그가 보여준 진실을 불편이라 부르지 않는다. 불편함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어느 덧 59번째 생일을 맞이한 부대신문은 지금까지 대학과 세상에 얼마나 불편하고 불온한 신문이었을까. 대학의 탄생과 함께하면서 ‘아카데미즘’을 담는 그릇으로서, 어두운 시절에는 젊고 올곧은 시대의 거울로서, 그리고 ‘대학신문의 위기’가 수식어처럼 붙어 다니는 오늘 날에는 대학정신의 마지막 보루로서 역할을 주문받고 있다. 부대신문은 이러한 시대적인 소명에 제대로 응답하고 있는걸까.

앞서 조정래가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하게 작품을 발표할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꼽은 것은 바로‘ 독자의 힘’이다. 검찰이 <태백산맥>을 조정래의 작가 생명을 끊는 구실로 삼지 못한 것 역시 당시 350만 명에 달하는 독자의 힘이다. 독자의 힘이 곧 진실의 힘인 것이다. 그의 작품을 읽은 수 많은 독자들이 남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독후감은 그의 불편함이 진실이었음을 입증한 것이다. 그래서 진실은 가려지기 쉽지만 힘이 세다.

프랑스의 대표적 진보지 <리베라시옹>은 윤리규정에서 ‘좋은 기사란 필연적으로 반드시 반론이 따른다’고 규정한다. 거꾸로 생각하면 반론이 없는 기사는 좋은 기사가 아닌 셈이다. 앞으로도 부대신문은 기꺼이 더 불편하고 불온한 신문, 논란이 되는 신문을 만들 생각이다. 오직 사실을, 진실만을 말하되 반론의 여지는 더욱 만들 것이다. 불편함을 감내하고 진실에 다가서는 일은 독자 여러분에게 남겨진 몫이다.

개인적으로 이번 한림원이 편집국장으로서 마지막 칼럼이다. 그간 귀중한 지면을 빌렸지만 모자란 필력과 무지함으로 독자 여러분의 ‘가려움’을 제대로 긁어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관대한 독자 여러분께 앞으로도 부대신문에 많은 성원과 비판을 해주길 부탁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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