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임사의 시절이다. 새 대통령의 취임에 맞물려 각 부처 장관과 공공기관장이 대거‘ 물갈이’되며 이임사가 쏟아진다.‘ 미래창조형’ 내정자와‘ 국가에 헌신할’ 후보자의 부적격 논란이 거듭되어 피로가 쌓이는데, 이임식의 풍경에 눈과 귀를 두기 어렵다. 언론에서 뽑아낸 몇 어절만으로 그를 가늠할 뿐이다. 그리고 대개는, 그 정도로 충분하다. 임기가 짧았건 길었건, 공과의 비율과 인물에 대한 호오가 어떻건 간에 이임사를 읽어나가는 일은 지루하다. 시에 도달한 유언과 잠언에 이른 묘비명을 떠올릴 순 있어도 기억할 만한 이임사란 도무지 낯설다. 의례용으로 상투화된 천편일률의 이임사가 있을 따름이다.‘ 열정’과 ‘소임’으로 시작하여 ‘성과’와 ‘해결’을 거듭하다가‘ 경쟁력’과‘ 세계적’에 이르러‘ 대한민국’을 외친 뒤‘ 감사’와‘ 행복’으로 끝맺는 식이다.

천편일률에서 한 발 더 나아가면 ‘자랑’과 ‘변명’에 닿는다. 청자는 지워지고 화자만 남아‘ 정당성’을 늘어놓는다. 너무도 휘황한 나머지 일거에 유토피아라도 이룬 듯한 자화자찬과 비판들을 겨냥한 날선 항변이 자기 연민과 섞여 분출된다. 가히 말들의 성찬이요, 언어의 인플레이션이다. 그들의 이임사가 그려낸 현실 세계는 완전하고 공직자로서의 자화상은 완벽하다.‘ 정의’와‘ 민주’와‘ 발전’이 ‘기수’와‘ 선봉’과‘ 보루’ 따위 말들과 뒤섞여 토해진다. 떠나는 자의‘ 최후 변론’에 너그러운 게 인지상정이라 하더라도 듣기에 민망하다. 누군가는 씁쓸할 것이고 누군가는 참담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몇 차례 겪었다‘. 재직 시절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추억’이라던 전 방송통신위원장의 퇴임 연설이 그랬고, ‘행복한 경찰관’이었다는 전 경찰청장의 이임사가 그러했으며‘ 대한민국에서 가장 행복한 일꾼’이라던 전 대통령의 고별 연설이 그랬다. 공익을 위해 복무한 공직자의 행복이라면 마땅히 국민은 수혜자로서 그 퇴임을 축복할 수 있어야 할 것인데, 과연 그러했던가. 우리가 확인할 수 있있던 것은‘ 정치적 수사학’의 요란함과 그만큼의 공허함뿐이었다. 반성과 고뇌의 육성이 말끔히 제거된 당대 이임사의‘ 작문 수준’과 그를 둘러싼 풍경이 곧 최근 한국 정치의 주소 아닐는지. 
 
효원굿플러스 사태가 결국 법정소송으로 치달았다는 소식을 접하며 김인세 전 총장의 이임사를 생각했다. 찾아볼까 했는데 구태여 읽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 문장들에서 흠결을 찾기란 어려울 것이고, 일년 반만에 발화자가 구속 수감자의 신분이 될 단서를 찾아내기란 더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과‘ 완벽’을 욕망한 문장들은 은폐와 기만에 더 가깝기 마련이다. 여기에‘ 우국’과‘ 충정’,‘ 정의’와 ‘민주’ 따위 그 자체로 묵직한 수사가 결합되면 거의 확실하다. 김훈의 말처럼‘ 정의로운 언설이 모자라서 세상이 이 지경인 것은 아니다.’ 거덜날지도 모른다는 학교 재정을 생각하며‘ 정당’했을 전 총장의 이임사를 부질없이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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