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설치미술가 이은숙

1979년 이화여대 미술대학 섬유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83년 홍익대학교 산미대학원에서 공예를 전공했다. 국내공모전에서 거듭 탈락하고 고배를 마셨지만, 미국에서는 형광 실과폴리에스테르를 혼합해 사용한 재료 덕택에‘ 외국인 특별상’과‘ 혁신적인 재료상’을 수상했다.

또한 독일, 캐나다 등에서는 <사라진 베를린 장벽>과 <뉴포츠담회담>이라는 작품으로 세계에 이름을 날렸다. 1945년 우리의 분단은 포츠담회담에서 결정됐다. 이 회담을 다시 화합을 도모하는 자리로 만들기 위해 회담이 열렸던 체칠리엔호프 궁전 앞 호수에서 <뉴포츠담회담>이라는 작품을 전시하기도 했다.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진 자리에 남북한 이산가족 5천 명의 이름이 적힌 <사라진 베를린 장벽>을 세우고 허물어 통일에 대한 열망을 세계에 알렸다. 이 작품을 BBC 등의 외신들이 1면에 앞다투어 보도하면서 그녀는 이름을 만천하에 떨쳤다. 
 
 

지금은 민간인통제구역에서 <정전 60년… 그리운 북쪽 가족을 부른다>를 통해 우리가 하나 되기를 호소하고 있다. 지난달 23일부터 이번 달 17일까지 민간인통제구역에서 <정전 60년…그리운 북쪽 가족을 부른다>을 전시한다. 이번 작품은 어떻게 탄생하게되었나?

-이번 작품은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액자처럼 사용해 이산가족들의 사진을 넣었다. 사진 속에서는 남편을 잃고 우는 아낙들, 시체 냄새가 심해 코를 막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생생히 담겨 있다. 분단을 상징하는 민간인통제구역에서 정전 60주년을 맞아 통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만든것이다. 이번 작품은 다른 곳과 달리 민간인통제구역이라는 특성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강한 형광색을 사용했다.

▲ 2013년 작 <정전 60년… 그리운 북쪽 가족을 부른다>
작품 소재를‘ 발견’했다는 표현을 썼을 정도로 형광실과 블랙라이트의 조합은 유일무이한 것 같다. 당시 이에 대한 예술계의 반응은 어땠나?

소재에 대한 아이디어는 슈퍼마켓의 단무지가 진공 압착이 된 것을 보고 얻었다. 평면에서 반입체로, 입체로까지 변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지만 지금 소재는 나의 작품 세계를 가장 잘 드러내준다. 당시 우리나라 예술계의 반응은‘ 너무 유치하다’ 였다. 화상 이후 잠도 자지 않고 매해 공모전에 작품을 냈지만 계속해서 고배를 마셨다. 처음에는 내 작품이 부족해서 입선조차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더 열심히 노력했다. 하지만 달걀로 바위를 쳐도 바위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해외로 눈을 돌렸다.

외국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국내에서는 생소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과거의 혹평은 사라졌는가?

국내와 달리 해외에서는 상도 받았고 주목도 받기 시작했다.‘ 사라진 베를린 장벽’을 전시할 때도 통일에 대한 주제로 할 것이라고 한국의 언론과 정부, 북한 대사관에까지 알렸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하지만 전시 이후 외신에서 보도를 많이 하고 주목받기 시작하니 그제야 눈길을 줬다. 나는 아직 한국의 예술계에서는 아웃사이더다. 한국은 계파나 학연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나와 같이 연줄이 없는 사람들은 성공하기 힘들다. 오죽했으면 지도교수가 나를 서자라고 칭했겠나.

▲ 2005년 작 <뉴포츠담회담> (사진=취재원 제공)
내세에 대해 다루던 작품 세계가 2005년 이후 <리빙투게더>, <뉴포츠담회담>, <사라진 베를린 장벽>과 같이 통일과 관련된 작품이 많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독일에서 활동하던 시절 한 전시회에서 독일의 동서를 가른 분단선에 대해 보았다. 그 당시 그 분단선을 보고 굉장히 큰 감명을 받았다. 몇십 년간 부모님께 여쭤보지 않은 내 형제에 대해서도 물어보게 됐으며, 그 이후 분단선 위에 현재는 같이 살 수는 없지만 남북한이 함께 사는 집인 <리빙투게더>를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전시를 했다. 부모님께서 한국전쟁 당시 남쪽으로 내려왔다. 부모님께 형제 얘기를듣고 통일에 대해서 다뤄야겠다는 결심을 했지만, 정작 부모님은 이해하지 못하고 나를 미친년이라고 했다. 후원금이 없어 집까지 팔아가며 일하는 나를 이해하시지 못하는 것이다. 

아직까지도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에대해서 얘기하는 것은‘ 종북 좌파’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남아있는 것 같다. 통일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당신의 작품을 어떻게 봐야 되나?

통일을 바라볼 때 대해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으로만 접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산가족인 내 얘기를 들으면 모두 마음이 바뀔 것이다. 내가 많은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받은 것도 작품을 통해 내 얘기를 했기 때문이다. 정치적⋅경제적 논리로 접근한다면 가장 기본적인 이산가족 상봉조차 힘들 것이다.

▲ 2007년 작 <사라진 베를린 장벽>(사진=취재원 제공)
예술을 시작한 1980년대에는 설치미술가에 대해서 더 생소했을 거 같다. 어떻게 설치미술가의 길을 가야겠다고 결정했나?

처음부터 설치미술가의 길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나의 꿈은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었다. 현

모양처가 돼서 화목한 가정을 만드는게 꿈이었던 나는 가정과를 가려 했지만, 내 손재주를 본 미술 선생님께서 자수과를 추천했다. 당시에는 자수과가 가정대 안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예술대였다. 예술가치고 너무 엉겁결인가? 졸업 후에도 설치미술가의 길을 가야겠다고 정한 것이 아니라 내 작품을 어떻게 하면 가장 잘 표현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계속 연구하고 만들다 보니까 설치미술가가 됐다. 

당신의 인생을 가장 크게 바꾼 터닝포인트는 무엇인가?

대학 졸업 후 파라핀으로 작업을 하다가 전신 3도 화상을 입은 적이 있다. 3년 동안 외출도 못하고, 여덟 번의 성형 수술을 받았다. 작가로서는 치명적일 수 있는 오른손을 못 쓸지도 모른다는 진단을 받았다. 죽음을 경험한 뒤, 내가 여기에 왜 태어났고, 여기서 왜 살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날의 화상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작품에 미친 듯이 목매는 나도 없었을 것이다. 화상 이후 내 인생뿐만 아니라 작품소재, 작품 주제 모두 달라졌다. 죽음을 경험한 뒤였기 때문에 내세에 대해 다루고 싶었다. 현생과 다른 분위기를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에 네온소재와 형광실을 부각할 블랙라이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2004년부터 미국의 로드 아일랜드스쿨 어브 디자인, 이화여자대학교, 베를린 자유대학교에서 강의한 적이있다. 학창시절과 어떤 점이 달랐나? 

영어도 잘하지 못하고, 독일어는 아예 할 줄 모른다. 미국에서나 베를린에서 강의할 때는 학생들이 수업 시간 이외에도 찾아와 묻고 상담하는 등 매우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말이 잘 통하는 한국에 와서 강의했지만 학생들이 매우 소극적이어서 실망이 컸다. 학교 다닐 때 선생님 말도 잘 안 듣고, 학점도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열정만은 가득했다. 하지만 지금 학생들은 작품에 대한 열정이나 오기가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예술가의 길을 걷겠다는 마음이 처음부터 있었던 건 아니었다. 대학에 입학한 뒤 미술학도로서 소양이 너무 부족한 거 같아서 서양화 개인지도를 받을 정도로 마음이 있었다.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개인지도를 받으면서 오히려 작가정신에 대해 더 배웠다. 예나 지금이나 학교에서 작가정신보다는 예술에 대해 기교를 가르치는 건 비슷한 것 같다.

앞으로의 목표나 작품 속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무엇인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많다. 장기프로젝트를 위해 머리를 따로 길러 땋으며 시간을 계속 재고 있다. 내 머리 길이를 보면 작품 할 시기가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할 수 있다. 벌써 5년이지났다. 앞으로 5년 안에 파리에서 가족과 관련된 전시를 해야겠다. 머리를 매만질 때마다 각오를 다잡고 한다. 얼마 전 평양에서 내 작품을 전시하는 게 어떠냐는 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한국인이 아니라 캐나다나 독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언젠가 한국인으로 평양에서 내 작품을 전시할 것이다.

이번 해에 민간인 통제구역이 아니라 사람들이 더 많이 볼 수 있는 광화문 옆 경복궁 돌담길에서 통일에 대한 작품을 전시하고 싶다. 아무래도 젊은친구들이 많이 볼 것 같다.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아픔이 많은 현장에 가서 내 작품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싶다. 미국의 아메리칸 원주민들의 부족 마을, 팔레스타인 등으로 떠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마지막으로 부대신문 인물면의 공통 질문이다. 당신의 20대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선생님의 애완동물이 되지 마라’라는 미국의 속담이 있다. 부모님 얘기나 선생님 말을 잘 듣는 학생보다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해라. 나 역시 베를린 장벽을 시작할 때 후원금 없이 서울의 집을 팔아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가족들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가족들의 반대 역시 심했다. 미쳤다는 소리를 정말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그 말을 듣고 관뒀다면 지금 내가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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