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젖은 빵’이라고 했다. 18세기 괴테의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 등장한 이 레토릭은 삶의 신산과 궁핍에 대한 핍진한 촌철로 오래도록 사용되었다. 그리고 2백 여 년이 흘렀다. 20세기 이 땅의 문인들은 세월의 더께를 얹고도 여전히 유효한 이 은유를 현재형으로 번안하기 시작했다. 아니, 더 절실하고 더 녹록찮은 문제로 옮겨갔다. 빵에서 방으로‘, 지상의 방 한 칸’을 말하기 시작했다.

맨 먼저‘ 지상의 방 한 칸’이라고 말한 이는 박영한이었다. 집필 공간을 찾아 변두리를 이 잡듯이 훑어낸 끝에 간신히 한 평 반 정도의 다락방 한 칸을 발견하는 것으로 끝나는 자전소설의 제목이었다. 이후 김사인과 최금진이 얼마간의 시차를 두고 같은 제목으로 시를 발표했고, 그 시차 사이에 김중식이‘ 식당에 딸린 방 한 칸’을 썼다. 최연소 수상 기록을 잇달아 갈아치우고 있는 김애란은 단편집 <침이 고인다>에서 고시원, 독서실, 반지하방, 다가구주택, 여인숙 등의 작고 누추한‘ 방’을 이야기했다. 차창룡이 ‘고립된 성채’, 박민규가 ‘관’, 김미월은‘ 동굴’이라 명명하며 거듭 호출한 곳은 고시원이었다. 언급한 작가들 외에도 허다함은 당연하다. 주목할 것은 시와 소설에서‘ 방’에 대한 천착이 집중된 것은 2천년 대의 일이라는 점이다. 예민한‘ 카나리아’들이 그렇게 한꺼번에 시대의 병리를 경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빵’에서‘ 방’으로의 이동은 빵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여전히 생존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결핍 상태임을 의미한다. 그 결핍의 극단에 대학가가 자리한다.

‘타워팰리스보다 고시원이 비싸다’(시사인, 280호)고 한다. 서울 시내 대학가 원룸의 3.3㎡당 평균 임대료는 약 10만 9천원. 이는 같은 면적을 놓고 봤을 때 서울 시내 아파트 월세의 두 배 수준이고 타워팰리스의 평균 임대료에 견줘도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 액수인데, 고시원의 경우 월세는 원룸과 비슷한 수준이나 방이 더 좁으므로 결국 주거 면적당 임대료는 가장 높다는 조사 결과였다. 이를 인용한 매체는 같은 제하의 연속 기사에서 미국, 프랑스, 독일, 중국, 일본의 대학가 또한 이처럼 열악한 주거환경에 처해있어 이 심각한 풍경이 전지구적 실태임을 짚었다. 여기, 부산도 결코 예외는 아닐 것이다.
 
고급화된 민자 기숙사가 문을 열고 대형화된 원룸이 골목을 메워가며‘ 명품 브랜드’ 아파트가 캠퍼스의 턱 밑까지 밀고 들어오는 동안 어깨 낮은 지붕의‘ 방 한 칸’은 거의 절멸했다. 부동산 투기 자본이 캠퍼스 안팎을 점령하는데도 주거비에 대한 제도적, 사회적 안전망은 거의 전무했다. 여기에 내몰려 오늘이 그렇고 내일도 그러할‘ 가난한’ 청년들을 위한 카나리아의 경고는 어제의 것들로도 충분하다. ‘한낱 남루’를 걸치고‘ 눈물 젖은 빵’을 먹는 ‘지상의 방 한 칸.’ 십여 년간 캠퍼스 언저리를 드나들었던‘ 자전’의 이력으로 말하건대, 적어도 주거환경에 관한 한 이곳의 오늘이 어제보다 낫다고는 결코 말하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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