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둔덕에 연보랏빛 쑥부쟁이 꽃이 한창이다. 혹독한 가뭄과 서너 차례의 잡초 베기를 견디고 핀 터라 더욱 대견하다. 그리고 튼실할 그 뿌리가 꽃보다 아름답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고 할 수 있는가? 보이지 않으나 보이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소홀히 여기면 안 된다. 뿌리 없는 나무가 생명력을 오래 유지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무는 뿌리가 가뭄과 비바람을 견딜 만큼만 자라야하는데, 어느 순간 생장환경이 좋다고 웃자라면 어려운 시기를 견딜 힘이 없게 된다. 이런 자연한 이치를 용비어천가에서“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쓰러지지 않는다.”고 했다.

어디 자연의 이치만 그러하랴! 사람살이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외모, 돈, 학점, 권력 등에 혈안이 되어 있다. 물론 그것들이 우리가 살아가는데 참으로 필요한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을 참으로 의미 있게 해주는 것은 그 안에 있지 않다. 가지와 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뿌리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장자가‘ 무용지용(無用之用)’이라 설파했듯이, 당장 유용성이 없는 듯 보인다고 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단정 짓지 말라. 쓸모 있다고 여기는 것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그것이 어디에 어떻게 쓰여야 좋을지에 대하여 물어야만 비로소 참으로 쓸모 있는 것이 될 수 있다.

현실적으로 삶의 중요한 요소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도록 중심역할을 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인문학은 바로 인간에 관한 본질적인 물음을 던짐으로써 인간과 삶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가능하게 해준다. 넓게 보아야 깊게 볼 수 있다. 시야가 넓고 정확해야 크고 작은 어려움에 잘 대처할 수 있다. 당장 돈이 되지 않는다고 인간이‘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할지 묻지 않은 채, 무턱대고 걸어간다면 눈뜬장님처럼 살 수밖에 없다. 

이른바 기초학문은 다양한 응용학문의 뿌리에 해당한다. 인간과 사회, 그리고 자연에 대한 올바른 이해없이 인간과 사회에 유익한 학문적 성과를 낸다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그것은 마치 수많은 어선의 고기잡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등대인 것과 같다. 등대더러 고기 한 마리도 못 잡는 주제에 바다에 왜 서있느냐고 하면, 어찌 되겠는가? 발등에 떨어진 불 끄는 데만 혈안이 된 사람은 평생 그리 살 것이다. 눈앞의 효용성만 따진다면 제대로 사는 일이, 행복한 삶이 가능하겠는가?

물론 인문학을 비롯한 기초학문이 우리가 직면한 문제적 삶을 직시하고, 우리 언어로 말하며, 어떻게 할 것인지 구체적인 답을 제시하고 있다고 판단되지는 않는다. 서양학문을 첨단으로 인식하여 이식하기에 급급하거나, 여전히 그들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할 일이다. 
 
그렇다고 하여 기초학문을 소홀히 해도 된다는 논리가 성립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제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더욱 적극적인 지원책이 필요하다. 부산대학교가 국립대학교로서 자본의 논리에 휘둘리지 말고 기초학문을 육성하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를 바란다. 학문의 반석을 굳게 하는 것이 부산대학교가 진정 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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