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이전에 노동은 놀이의 영역과 엄격히 분리되지 않았다. 노동 시간의 상당 부분은 놀이와 더불어, 놀이처럼 이루어졌다. 지금도 여전히 농어촌 지역에서 불리고 있는 노동요는 전근대적인 노동과 놀이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예다. 거기에는 노동의 생산성을 보장하려는 의도뿐만 아니라 인간의 활동을 상상적 창조의 영역으로 재구축함으로써 노동하는 자들 스스로의 문화적 역량을 창출하려는 자족적인 욕망 또한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노동 시간이 확립되고 그에 대비되는‘ 여가’ 시간이 창출된 근대 이후, 노동자는 노동 시간에 더 이상 노동요를 부르지 않는다. 노동가요, 민중가요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집단의 단합과 의지를 고취하기 위해 불릴 뿐이다. 노동 시간이 철저한 계산 하에 임금과 교환되기 시작하면서 노동은 흥겨운 놀이도, 창조적인 예술도 아닌 그저 자본의 이득 창출과 회전을 위한 소비재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렵게 되었다.

물론 노동은 임금과 교환되는 이상의 가치를 갖고 있다. 70~80년대 한국의 노동자들이‘ 산업역군’ 내지는‘ 산업전사’로 호명된 이유다. 자신의 희생으로 공동체의 안존에 기여하는 이를 신성한 존재라 일컫는다면, 그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임금시장에 헐값으로 팖으로써, 한 가정뿐만 아니라 국가와 민족의 경제 발전에 이바지하는 신성한 직무를 수행해 왔다. 저임금과 고강도, 고위험의 근본적인 노동여건을 개선하기보다 그 허울뿐인 기표를 내세우는 편이 국가나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훨씬‘ 생산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신성한 노동은 누구나 즐겁고 가볍게 즐기는 놀이로 여겨지고 있다. 놀이는 다른 목적과 이득을 위해 행해지지 않고 오직 스스로의 몰입감과 놀이과정 자체의 흥미로움 때문에 행해진다. 마찬가지로 노동 역시 놀이처럼 노동자의 자발적인 참여 가운데 몰입해 가는 것이 될 수 있다. 수많은 자기계발서, 취업안내서의‘ 맡은 일을 놀이처럼 하라’는 경구는‘ 전근대적인’ 노동이 지니고 있던 유희적 특성을 세련된 현대의 노동담론인양 포장한다. 하지만 이는 노동자의 자발적인 노동 참여를 강요하여 그의 의지와 정신마저 자신의 소유로 삼으려는 자본의 추악한 욕망만을 드러낼 뿐이다. 
 
놀이는 반대로, 노동처럼 목적과 이득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 기업들은 노동자의 노동행위에서 뿐만 아니라 광고, 이벤트, 상품판매방식 등에 이르기까지 무시로 놀이의 요소를 도입하여 소비자의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제시하는 놀이는 자본의 투입 없이도 이윤을 창출하는 데 기여하는 노동이다. 포털사이트의‘ 지식 제공’ 서비스들은 수많은 유저들이 별 이득 없이도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방대한 콘텐츠를 갖출 수 있었다. 그러나 수익은 기업이 독점한다. 
 
근대에 이르러, 놀이와 노동은 자본의 기획에 의해 자발적이고 순수한 놀이와 비자발적이고 순수하지 않은 노동의 영역으로 나뉘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힘이 두 영역의 구분을 다시 철폐시키려 한다. 아직 정복하지 못한 놀이의 영역을 자신의 영토로 삼으려한다. 놀이하는 인간이 자본주의 체제에 가장 적합한 인간상이 될 날이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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