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을 호령했던 전설의 고수 넷이 모였다. 하늘을 가르는 권(拳)과 검(劍), 바람마저 제압하는 경공과 천지를 얼려버리는 빙공을 쓰는 이들은 더구나 죽지도 않는 금강불괴의 몸으로 강호를 주름잡던‘ 네 마리 용[四龍]’이었다. 그러나 대의가 있다면‘ 서른 두 평 아파트’ 정도이고, 오직‘ 돈이 최고’인 세상에서 그들은 겨우‘ 네 마리 미꾸라지’ 정도로 전락하여 저녁상으로 받은 추어탕의 맛이나 타박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수저를 놓고 도제를 불러 불손한 태도며 게으른 무공을 꾸짖는데, 이에 도제가 울먹이며 대든다“. 네 분이 합치면 뭐… 삼성한테 이길수 있습니까?”

무협지 형식을 빌린 박민규의 단편소설 <𪚥>(2008)의 한 장면이다. 의도된 가벼움으로 결코 가벼울 수 없는 주제를 말해온 작가 특유의 화법이 고스란히 드러난 소설이지만, 말미의 저 대사는 이제 은유적 장치라기보다 차라리 직설에 가까워 보인다. 제자의 대거리에 극강의 무공들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처럼, 삼성한테 이길 수 있는 이들의 이름을 우리는 쉽게 말하지 못한다. 핵심부서의 임원으로 7년간 재직한 변호사의 폭로도, 같은 편에 섰던 사제단의 증언도, 2년이 걸린 사법부의 판결도 전무후무한 1인 특별사면으로 간단히 끝나지 않았던가. 오히려‘ 떡값’ 검사들의 실명을 공개한 국회의원과 관련 사안을 줄기차게 다뤘던 기자와 무노조 경영에 맞서 온‘ 노조위원장’은 하나같이 어딘가 부러졌다. 직을 박탈당했고, 자격을 상실했고, 구속 수감되었다. 그러니 ‘사룡’의 ‘율사’인왕년의 민주투사가 딸에게“ 그래도 민주야… 경제가 전부는 아니잖니”라고 말했다가“ 어려운 얘기 하지도 마. 난 돈이 전부야”란 퉁박을 맞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이 시대 음울한‘ 극사실주의’ 풍경화다.

 
요컨대‘ 초일류 기업’ 삼성의 문제는 몇 해전 사건으로도 여실히 증명됐듯 그 ‘초법적 지위’에 있다. 총수 일가의 비리는 학계와 재계와 언론과 관·검·경의 비호도 모자라 대통령까지 나서서 덮어주고, 백혈병에 걸린 직원들은 대형 로펌과 여기 그 이름을 쓰기에도 민망한 근로복지공단이 대신 쫓아버렸다. ‘정의는 이긴다’가 아니라‘ 삼성은 이긴다’는 복음이 수시로 전파되는 이‘ 삼성공화국’에서‘ 민주’는 더없이 무기력하다. 

지난달 말, 삼성전자서비스 기사로 일하던 최종범 씨가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에어컨을 수리하던 젊은 가장이 채 돌이 지나지 않은 딸을 남겨놓고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한 데에는, 진상을 피우던 고객의 탓도 있을 것이고 욕설로 질책하던 서비스센터 사장의 몫도 있을 것이며, 굴종을 강요하던 ‘고객만족도평가’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가 노조에 가입한 이후 일감을 거의 받지 못했고, 몇 년 전 일을 소명해보란 식의 감사에 시달렸으며 이로 인해 고통스러워했다고 남은 이들은 말한다. 결국 노조 때문이었다는 얘기다. 삼성의 사내 행사에 초청된 가수가 뭘 불렀는지 일일이 읊어대던 조중동은 서른둘 한서린 죽음을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고, 삼성의 관계자는 고인은 본사가 아니라 하청업체 직원일 뿐이라는 괴상한 말을 해대며 삼성의‘ 무노조 신화’에 복무한다. 무노조 신화라니. 제대로 된 나라라면 그 자체로 모순이어야 하건만, 우리는 이미 무감각하다. 신화의 요소가 무엇인가. 비인간, 비현실, 비이성 아닌가. 무노조를 신화처럼 지키려는 기업이 군림하는 한 우리의 ‘민주’는 한없이 가난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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