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90년대를 반추하는 대중문화가 유행하고 있다.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 영화 <건축학개론>의 성공을 필두로 90년대 연예인에 대한 재조명과 재등장이 본격화되고 있고, 90년대 유행했던 가요만 틀어주는 주점까지 생겨나 성행하고 있을 정도다. 30대를 중심으로 10~40대까지 광범위하게 90년대 복고문화가 호응을 얻고 있다는 언론 기사도 보인다. 지금의 3, 40대가 90년대 문화를 적극적으로 향유했던 소위 ‘X세대’였고, 현재 대중문화를 생산 · 소비하는 프로슈머(prosumer)로서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이들이 공통으로 간직하는 문화적 감성을 오늘날 다시 호출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90년대 대중문화는 소위 ‘황금기’였다. 복고문화가 기억할만한 ‘꺼리’없이는 일어날 수 없다면, 90년대 대중문화는 그 ‘꺼리’가 매우 풍성했다고 할 수 있다. 아이돌의 등장과 언더그라운드의 부상, 신진 영화감독들의 약진과 대중적인 성공, 세련된 트렌디 드라마의 유행등 새로운 대중문화의 감수성은 분명 80년대와는 차별화된 색깔과 스펙트럼을 보여주었다.

90년대 대중문화는 80년대 중반 이후 맞게 된 경제호황과 그에 따른 문화소비욕구의 증대, 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의 진전, 88년 올림픽 개최에 따른 문화적 자신감의 획득 등 80년대 중후반의 긍정적 토대 위에서 꽃을 피웠다. 더욱이 독일의 통일(90년)과 소련의 붕괴(91년)는 90년대의 에피스테메(인식틀)를 ‘투쟁’에서 ‘향유’로 자연스럽게 옮겨가게 했다. ‘적’이 사라진 시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공동체의 대의가 아니라 사적 개인의 욕망임이 확인된 것이다. 90년대 대중문화는 그 다양한 욕망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런데 기억이라는 출력 방식은 매우 교묘해서, 과거를 기억하고 싶은 대로 출력한다. 90년대에 대한 ‘기억의 재편’이 흔히, 순수하고 아름다웠지만 그만큼 ‘뭘 몰랐던 시대’로 재현되는 양상 또한 마찬가지다. 여기에는 강물에 비친 자기 얼굴을 이상적인 타자로 여겼던 나르시스처럼, 이미 있는 것을 아직 있지 않은 것으로 확정하려는 욕망이 비치고 있다. 90년대 복고문화는 단순한 ‘추억팔이’가 아니라, ‘있음’과 ‘없음’의 차이를 근본적으로 분리시키려는 성급한 시대단절론을 깔고 있다.

단적으로 말하자. 90년대에 한국사회에서 일어난 가장 큰 이슈는 97년 ‘IMF 구제금융신청’이었다. 그해 겨울, 많은 사람들은 어느 해보다 혹독한 추위를 겪었다. 새 천년을 맞으면서도 불안과 근심을 떨치지 못했다. ‘샴페인을 일찍 터뜨렸다’는 비아냥을 들으면서, 서로를 ‘부자되세요’란 덕담으로 위로하면서, 90년대 이후 한국사회는 신자유주의가 내세우는 경쟁의 기치를 온 몸으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90년대는 추억 속에 묻힌 과거가 아니라 지금-여기의 우리를 규정하는 여전한 현재다. 그럼에도 90년대를 재현하는 대중문화 속에 97년은 흔히 생략된다. 모든 복고는 시대단절론이 전제된다. 그러나 어떤 복고는 단절할 수 없음에도 단절시키려 한다. 나르시스는 이미 갖고 있는 자기의 얼굴을 타자로 상상함으로써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90년대 복고의 나르시시즘이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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