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교문을 들어서면서 낯선 풍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교내 주요건물에 커다란 걸개 그림이 내걸리고, 거리 가로등엔 플래카드와 깃발이 드리워져 있으며, 심지어 카페가 마련된 데다 컨퍼런스, 예술제, 사진전, 공예전까지 열렸다. 이들은 모두 학교 당국이‘ 부산대 건학정신 회복’이란 슬로건 아래 초대총장이었던 윤인구 박사를 재조명하는 프로그램들이었다.

부산대의 초대총장으로서 윤인구 박사가 갖는 역사적 몫을 부정할 이유는 없다. 또한 이순을 넘긴 학교가 과거의 기억을 추억한다고 하여 탓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시점이다. 주지하듯 재정은 수백억의 빚을 안고 있고, 교수들은 성과급 연봉제로 술렁이고 있으며, 학생들은 학교에 대한 자긍심이 바닥에 떨어져서 ‘학문적 공동체로서의 대학 사회’는 궤멸 직전이다. 과연 지금 우리가 그를 강제 기억해내고, 목사로서의 종교적 신념과 대학 교육실천이 착종된 그의 생각을‘ 건학정신’으로 이데올로기화하는 것이 타당할까? 그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 혹자를 호명하는 일은 역사의식과 관련 있고, 기원을 추급하는 행위는 현실의 치열함을 도외시할 때 나타나는 자폐인 경우가 많다.

작금 소수의 ‘건학정신’ 운운이 ‘대학으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는 부산대를 되살리기는커녕 학내 구성원의 외면을 받는 실패한 이벤트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부산대 재창학(再創學)을 위해 다
음 세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진리’를 확보하기 위한 모든 강좌를 허(許)하라. 학문적 진리를 찾아내지 않는, 아니 못하는 대학은 존립 근거가 없다. 그 진리는 교수와 학생이 만나는 공간, 바로 강좌에서 이뤄진다. 단, 진리를 생산하지 못하는 강좌는 폐강하되, 진리를 모색하는 강좌는 무엇이든 허하라. 진리 추구라는 대전제를 충족한다면 교수와 학생을 믿고 저들이 원하는 것을 해주라.

둘째, ‘자유’를 위한 모든 논의를 허(許)하라. 극우와 극좌를 제외한, 인간 본연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더 나은 곳으로 진보하기 위한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라. 단, 남의 인간성을 파괴하고, 비판을 위해 비판하며 책임지지 않는 논의는 자제하라. 비판과 실천을 이분시하는 태도도 자제하라. 또한 독재와 분단을 옹호하는 논의는 자제하라. 민주와 화합은 수십 년간 부산대가 만들어 온‘ 정의’였다. 그 정의를 지켜라.

셋째, ‘봉사’를 위한 모든 안배를 허(許)하라. 개인은 관계 속에서 성숙하고 완성된다. 인간을 맺어주는 가장 아름다운 관계가 봉사다. 학교는 관계를 구성하기 위한 모든 정보를 제공하고, 배운 것을 사회에 환원하려는 모든 노력을 지원하라. 대학만의 대학은 의미 없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배려가 그 조직의 문명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임을 잊지 말라.

이 세 가지 제안은 우리가 대학인으로서의 자존심을 회복하고, 대학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최소한의 요구다. 시절이 어려울수록 가장 근원적인 곳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의 애잔한 추억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을 위한 방향 재설정과 용기 있는 자강불식의 태도다. 부디 학내구성원들의 공감과 동의를 바탕으로 사심 없이 부산대의 미래가 그려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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