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경민 씨는 학교 앞 인문학카페 ‘카페 헤세이티’의 매니저다. 운영에 어려움을 겪던 헤세이티를 운영하며 ‘입간판’ 시를 쓰는 ‘입간판쟁이’로 유명해졌다. 그의 입간판 시를 모은 책 <불온한 입간판>도 출판을 앞두고 있다. 카페 헤세이티에서는 시인 학교, 시인초청 강연 등 다양한 문예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시의 죽음’에 대한 소문이 항간을 떠돈다. 세계에서, 아니 우주에서 가장 시인이 많은 나라에서‘ 시의 죽음’이라니 이 무슨 구신 신라면 끓여먹는 소리란 말인가? 그렇다면 그 수많은 시인들이 시를 안 쓰고 소설을 쓴다는 말인가? 시인들의 손가락이 모두 잘려 나가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시인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해서 파업이라도 하고 있다는 말인가? 이도저도 아니면 모두 담합해서 시의 나라로 이민이라도 갔다는 말인가? 참으로 요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 생각에는 이건 필시 유언비어일 가능성이 크다. 시인들을 음해하려는 세력이 퍼뜨린 ‘카더라 통신’일가능성이 크다. ‘시의 죽음’이라니? 이는 필시 소설을 팔아먹으려는 소설가 놈들의 궤변일 가능성이 크다. 시인과 붙어먹고 떨어져나간 내연녀의 원한에 찬 자작극일 가능성이 크다. 시인의 집 앞에서 치맥을 먹다가 싸운 적이 있는 옆집 아저씨의 분노가 부른 괴소문일 가능성이 크다. 치맥을 좋아하는 시인이 얄미워 죽겠는 삼겹살집 주인의 복수극일 가능성이 크다. 북한의 지령을 받아서 체제전복을 꿰하는 주사파(酒邪派)의 내란음모며, 선동일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시인공화국’에 대한 가장 심각한 정면도전이며, 음해인 것이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이것은 시인들의 자뻑일 가능성이 크다. 시집을 내도 시집이 안 나가니까, 시를 써도 시를 안 읽으니까, 시인이라고 말하면 독자놈들이 그저 실실 비웃으니까, 죽었다고, 죽을 거 같다고, 내 좀 한 번 봐달라고 시인들이 엄살을 부리는 게 틀림없다. 그것도 아니라면, 시(詩)란 말(言)로 절(寺)을 짓는 일이니까 시인들이 모두 절 하나씩 짓고 절로 간 게 틀림없다. 기왕에 절로 갔으니 모두 토굴로 기어들어가 면벽수행에 매진 중인 것이 틀림없다. 백척간두진일보를 망설이고 있는 게 틀림없다. 쉬바, 입맛은 살아가지고 절밥이 맛있으니 산에서 내려오지 않는 것이 틀림없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니 시가 죽으면 어떻고 살면 뭐하겠는가? 시면 어떻고 산문이면 어떤가? 분별심을 버리고 일체가 하나인 무아지경에 빠진 게 틀림없다.

그것도 아니라면, 죽어야 산다는 역설, 시인들 특유의 감수성에 따른 수사일 가능성이 크다. 시인이니까, 쉬바 시인은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니까, 시인은 끝까지 진실을 파헤쳐 드러내는 자이니까, 이 이 부조리하고 모순된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시인들이 강력반 형사처럼, 정보과 형사처럼 수사를 시작한 것임에 틀림없다. 죽음-삶의 이분법을 뛰어넘어 죽음이 삶이 되고 삶이 죽음이 되는 세계, 그러니까 ‘시의 죽음’은 ‘시의 삶’을 드러내는 가장 강력한 역설이요, 반어요, 과장이요, 은유요, 상징임을 드러내는 수사를 시작한 것이 틀림없다.

만약 이것마저 아니라면, 어쩌면 애초에 시는 없었는지 모른다. 시인이 없었는지 모른다. ‘부재의 죽음’일지 모른다. ‘유령의 죽음’일지 모른다. ‘죽음의 죽음’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하나, 내가 시인이 되는 수밖에 없다. 당신이 시인이 되는 수밖에 없다. 나의 시를 당신이 읽고, 당신의 시를 내가 읽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 마이싱 한 방 맞자. 조까라 마이싱이다. 시는 금방 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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