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부터 해괴한 노릇이었다. 당사자는 없고, ‘지인’과 ‘관계자’와 ‘친구들’의 ‘증언’만으로 채워진 지면이었다. 보도원칙의 기초조차 지키지 않은 함량 미달의 기사가 분명했는데, 나라가 들썩였다. 질문의 타당성은 묻지 않았고, 방식의 정당성은 안중에 없었다. 본인의 동의없이 공개가 금지된 신상 기록을 낱낱이‘ 털어버린’ 취재였는데, 법을 다루는 주무 부서의 장관과 통치권자의 측근들은 당사자로 거론된 이를 탓할 뿐이었다. 미심쩍은 의도는 차치하더라도 불법성 다분한 취재를 묵인한 그 결과, 오로지 검찰총장이 혼외자 아들을 두었는가 여부만이 중요해졌고, 인권이니 사생활이니 취재 윤리니 하는 것들은 내던져졌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는 거의 모든 언론사에서 보낸 기자들이 한 아파트를 포위하고 있는 광경을 보게 된다. 벌떼처럼 기자들이 몰려든 곳은, 이제는 사퇴해버린 검찰총장의 자택도 아니고, 그와의 사이에 혼외자식을 뒀다고‘ 지목’받은 이의 거처였다‘. 의혹’을 처음 제기했던 신문사는 일찌감치 4~5명 기자들을 보내 24시간 대기시켰고, 어느 수완 좋은 신문은 집 안에서 새어나온 몇마디 말만으로 기어이 기사를 만들어 내보냈다. 그러나 언론과의 접촉을 피하고자 걸어 잠근 문을 두드려대고, 사실상 감금 상태로 만들며 겹겹이 현관 복도를 에워싼 취재진의 열기에서 감지되는 건‘ 알 권리에 대한 열정’ 따위의 성질이 아니라 집요한 맹목 아니면 무신경한 폭력성이었다. 문 안쪽에 있는 이가 세상에 얼굴을 공개해야 할 책임이나 입을 열어야 할 의무를 지닌 공인(公人)이던가. 그 괴이쩍은 열기 앞에 혼외자의 사실 여부가‘ 공익’적으로 얼마나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은 부질없어 보인다.
젊은 기자들을‘ 뻗치기’로 내몰고 있는 ‘데스크’는 더 끔찍했다. 한 언론의 논설위원이 전 총장을 ‘아버지’로 부르는 ‘초등학교 5학년’ 아이를 화자로 내세워, 확인을 다퉈야 할 모든 사안을 기정사실화한‘ 창작물’을 써낸 것은 그 끔찍함의 절정이었다. 이쯤되면 윤리의 결핍이 아니라 파탄을 고백해야 한다. 이 유치하고도 저열한‘ 폭력’에 보다 못한 아동인권단체가 비판성명을 내기에 이르렀다. 11살 아이의 생활기록부와 지극히 내밀한 감정마저도 마구잡이로 끌어다 쓰는 그들에게 언론의 책임을 따져야 하는 일은 허망한 노릇이지만, 지난 대선에서 국정원 여직원에 대한‘ 인권 유린’을 부르짖던 그 지면들이 이제 그 단어를 지워버린 것은 허탈할 따름이다.
모호하기 그지없는 공익의 실체를 얼마 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개개의 사익(私益) 앞에서 일단 멈춰야 하고, 아울러 끝내 불가침의 기본적 영역이 있으니 그를‘ 인권’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공인도 아니고 죄인은 더욱 아닌 이들을‘ 알 권리’나 ‘사실 규명’이라는 미명 하에 카메라 앞에 불러 세울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다. 인권 그 자체를 보호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아파트 앞은 취재진이 점령했고, 종합편성채널의 아나운서와 평론가는 하나마나한 추측과 가정만을 낄낄거리며 내놓았으며, 국제기구까지 나서는데도 국가인권위원회는 철저히 침묵했다. 그 동안‘ 인권’이라는 말의 가치는 곤두박질쳤고, 우리의 인권 또한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