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판본으로 소비되고 있는 <삼국지>서사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적벽대전이다. 특히 제갈량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제단(祭壇)을 쌓아 동남풍이 불게 해달라고 기원한 뒤, 정말로 동남풍이 불기 시작하는 장면은 냉철한 논리와 명분 싸움이 전개되던 이야기에 사뭇 이질감마저 부여한다.

물론 제갈량은 그와 같은 신적인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 다만 그는 사람들의 인과결정론이라는 환상을 교묘히 이용하여, 동남풍이 불 때까지 제(祭)를 지냈을 뿐이다. 하늘에 제를 지내는 것과 동남풍이 분 것 사이에는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음에도, 제갈량은 이 둘을 인과관계로 묶어내기 위해 퍼포먼스를 연출했던 것이다. 그는 하늘을 움직인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심리를 움직인 사람이다.

기실, 인과결정론은 사물과 사태를 판단하는 편리하고도 쉬운 태도이다. 하나의 사건(결과)에는 반드시 어떤 원인이 있다는 생각은 그 원인만 밝혀내면 결과를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다. 게다가 그 원인을 관리만 할 수 있다면, 결과의 도출 가능 여부까지도 관리할수 있다. 근대론자들이 꿈꾸었던 과학적 사고, 즉 사물과 사태에 대한 적극적 해석과 본질 찾기는 인과결정론이 전제되어 있는 세련된 판본이다.

최근 개봉한 영화 <관상>이 제기하는 운명론적 서사는 언뜻, 포스트모던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인식적 바탕과는 맞지 않아 보인다. 이 영화에서 관상가 김내경은 수양대군의 반역과 아들 진형의 죽음을 관상으로 읽어내면서도 끝내 막지 못한다. 얼굴(원인)-현실(결과)로 이어지는 서사는 ‘운명’이라는 인과결정론의 전근대적 버전으로 읽어도 무방해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사태를 인과결정론으로 읽는 데에는 익숙하다‘. 말이 씨가 된다’는 여전히 통용 가능한 가치를 갖고있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는 사태에 대한 원인이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약자를 원인으로 지목하여 해결하는 방식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한국의 실업 문제는 외국인 노동자 때문이고 정치 갈등은 전라도 때문이며 결혼율과 출산율이 낮은 이유는 된장녀 때문이라는, 사태를 봉합하는 매우 손쉬운 방식이 그 예다. 문제는 이러한 원인 찾기가‘ 근대의 파탄’을 증명한 홀로코스트를 야기한 논리와 똑같다는 점이다.

원인은 발견되기보다 발명된다. 인과결정론은 사태의 복잡성을 일거에 정리하고 마무르기 위해 만들어진 더할 나위 없이 믿기 좋은 환상이다. 그러나 누구보다 운명의 힘을 알고 있던 관상가 김내경은 관상이라는 환상 속에 머물지 않고, 누구보다 강렬하게 운명과 직접 마주하여 환상을 가로질렀다. 그리하여 운명론적 서사처럼 보이는 <관상>을 아이러니 내지는 패러독스의 서사로 만들어 놓았다. 그가 수양대군의 얼굴에 점을 찍어 반역의상(相)으로 만들려 했던 이유는 미래가 꼭 그렇게 될 것이라고 확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과결정론에서 미결정의 확률론으로 비약하는, 근대 이후의 인식론적 윤리가 김내경의 행동과 만나는 접점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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