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서류’ 인문학자가 바라본 인문학 위기의 실체

 

흔히들 인문학의 위기를 말한다. 하지만 왜 인문학의 위기인지, 인문학의 위기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는 깊게 고민하지 않는다. 인문학의 위기는 학내외로 다르게 나타난다. 학내에서는 무관심으로, 학외에서는 제도로 인문학을 오염시킨다. 인문학의 위기를 타개할 방안을 김동규(철학) 강사가 생태계에 비유해 분석한다. -편집자 주

관광연구원에서 개최한 토론회 “(새로운 시대의 화두, 인문정신문화 진흥”)에 논평자로 참여한 적이 있다. 오늘은 거기서 토론한 내용을 바탕으로 인문학 위기에 대한 단상을 풀어본다.

나는 문자 그대로 양서류(兩棲類) 인문학자이다. 쉽게 말해 학교‘ 안’에서도 인문학을 가르치고 학교‘ 밖’에서도 인문학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덕분에 의도치 않게 물속(학교 안 인문학) 사정과 물 밖(학교 밖 인문학) 사정을 조금씩 보게 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상은 두 가지인데, 우선 대학 내에서 취업과 관련 없는 학문, 특히 인문학이 고사하고 있는 상황과, 학내의 교육제도에 인문학이 자율성을 갖지 못 한다는 것이다. 이어서 학교 밖에서는 인문학 강좌가 대환영을 받고 있지만, 생각보다 이런 상황이 그리 환영할만한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문학이 인스턴트화되고 쇼핑과 소비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문제를 넘어서, 이러한 인스턴트 상품을 만들어내는 제조기관에 의해 인문학의 자율성이 파괴되고 있다는 데도 문제가 있다. 그래서 인문학 강좌를 주최하는 기관에 따라, 그리고 인문학 강좌를 개설한 사업의 성격에 따라 인문학 강좌의 자율성이 심각하게 훼손되기 십상이다.

 

인문학이 숨쉬기 힘든 물안팎의 상황

우선 물 밖 상황을 살펴보자. 학교 밖 인문학 강좌와 관련된 기관들을 나열해 보면,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광부), 보건복지부, 외교통상부, 연구재단, 한국학중앙연구원, 국학연구원,각 지자체 및 구청과 동사무소, 방송국을 위시한 사업체, 비정부기구 및 시민단체, 자생적 민간단체 등이 있다. 그리고 사업의 성격에 따라 △단발성 인문학 강좌 △간헐적 테마형 기획 인문강좌 △간헐적 비테마형 기획인문강좌 △장기적 테마형 인문학 강좌 △장기적 비테마형 인문학 강좌가 있다. 단발성 인문학 강좌는 말 그대로 일회적이고 단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인문학 강좌를 말하고, 간헐적 테마형 기획 인문강좌는 늘 개설되는 강의는 아니지만, 간헐적으로 특정한 테마를 기획해서 1인이나 다수의 강사에 의해 진행되는 인문학 강좌를 말한다. 반면 간헐적 비테마형 기획 인문강좌는 간헐적 테마형 기획 인문강좌와 같지만 기획된 테마가 없다는 점이 다르다. 지속적 테마형 인문학 강좌는 테마를 정해서 인문학 강좌가 진행되지만, 강좌가 끊이지 않고 1인 또는 다수 강사에 의해 강의가 진행되는 형식이다 끝으로 지속적 비테마형 인문학 강좌는 장기적 테마형 인문학 강좌와 같은 형식이지만, 테마가 없다는 점이 다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문학 강좌는 제도와 그 제도가 운용하는 사업 및 사업주체의 성격에 따라 그 성격이 현격히 달라진다.

이제 물속 상황을 한 번 살펴보자 교육부를 비롯하여 일선 대학 및 최근 서서히 두각을 보이는 사내대학을 비롯하여 초・중・고등학교 등에서 인문학 강좌가 열리고 있다. 대학은 이미 마련된 제도에 의해 인문학 강좌가 시행되고 있지만, 그 강좌가 인문학의 학문적 성격보다는 그 제도를 산출하는 권력의 성격에 더 민감하다는 것이 문제며, 그 권력의 정점에 학문보다는 취업과 생계라는 가치가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취업과 생계라는 가치를 이미 완벽히 실현하고 있는 사내대학에서, 인문학은 이미 취업한 사람들에게 인스턴트 교양을 주입하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리고 초・중・고등학교는 사업을 빌미로 대학 등지에서 인문학을 1회 아웃소싱하고 있는 상황으로, 각 학교 내 선생님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인문학이 가르쳐지는 토양은 아주 척박하다. (여기서 대안학교와 대안대학은 인문학의 사각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 (일러스트=권나영)

제도로부터 자율성을 상실한 인문학

중요한 것은 인문학이 제도(시스템)에 의해 안팎으로 난도질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만 학교 안 제도이냐? 학교 밖 제도이냐 하는 점이 다를 뿐이다. 아마 학교 안 인문학을 다루는 교육부와 학교 밖 인문학을 다루는 문광부로 인문학이 크게 이원화되어 있는 상황을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문학의 위기는 제도로부터 자율성을 상실한데 있을지 모른다. 시스템이 인문학을 난도질한 덕분에 일상에서 인문정신이라는 것은 여기저기 파편이 되어있다. 강력한 제도적 구속으로 인해 이미 활력을 잃은 학교 안 인문학은 수강하는 학생들의 활력을 서서히 파괴하면서 스스로 고사하는 중이고, 학교 밖에서 각광받는 인스턴트 시민 인문학은 어쩌면 사회구조가 난도질한 생을 회복시키려는 스펙터클하고 성급한 화해의 전략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니콜라스 루만이 일찍이, ‘현대인은 시스템이 난도질한 인격적 총체성을 회복시키기 위해 더욱 사랑에 열광하게 된다’고 언급한바 있듯이, 인문학에 대한 학교 밖 열광 역시 그런 상황은 아닌지. 만일 이런 예상이 맞는다면, 학교 밖에서 환영받는 인문학은 여전히 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 인문학은 자칫 버려질 골동품이 되어버리거나 일회용 쓰레기로 전락할지 모른다.

 

인문학은 아프다

그러면서도 인문학은 스스로 위기를 선포하며 제도 안팎에서 스스로를 구조하려 든다. 제도의 힘을 빌리 든, 그렇지 않든, 인문학이 제대로 구원되려면, 이미 난 상처를 성급하게 때우고 봉합하려 해서는 안될 것이다. 인문학은 스펙터클한 사랑과 같은 총체성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삶과 사회의 삶에 늘 균열이 있고 상처가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회복해야 한다. 인문학이 상처난 총체성, 또는 텅 빈 기존의 총체성을 보여줌으로써, 이를 새로운 추진력으로 삼는다는 것. 분열, 상처, 균열을 발견하고, 이로 인해 발생한 공포나 웃음 덕분에 인문학이 구원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인문학은 그 수많은 위기 속에서 거뜬히 무릎에 힘을 주고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학교와 학교 밖에서 단순히 시스템과 그 시스템 운용을 위한 기계나 도구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인문학과 인문학자는 그 구멍 난 총체성을 메우고 비우고를 반복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인문학의 위기는 상처와 구멍을 망각한 인문학과 인문학자에 의해 초래되는 것이다. 뜬금없이시 한 편이 생각난다.

 

……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 그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성복의 시 <그날> 중에서

 

인문학은 단순히 다친 상처와 구멍을 메우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상처를 내기도 하고 구멍을 내기도 해야한다. 물이 들고, 나고, 흘러야 그 생명을 잃지 않듯, 인문학 역시 상처와 구멍을 내고 메우면서 자신의 생명을 얻는다. 아무도 아프지 않은 곳에서 인문학은 그저 안락사할 뿐이다.

 

▲ 공간초록에서는 시스템에 의한 인문학이 아닌,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독서모임, 음악회 등을 한다(사진=취재원 제공)

인문학 습지대를 형성하자

작년 국가 인문학(인문주간)의 주제였던‘ 힐링’이나 올해 국가 인문학의 주제인‘ 희망’ 역시 이처럼 들고 나는 과정 없이는 한낱‘ 상처’나‘ 절망’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물이 기어이 보(댐)나 둑으로 막힌다면, 그 물은 썩기 마련이다. 그러니 인문학 역시 자유롭게 흐를 수 있어야 한다. 냇물도 생기고, 샛강도 생기고, 이것이 강물로 모이고 바다로 흘러야 한다. 바다도 해류가 있고 밀물과 썰물이 있고 가운데 습지와 기수역(짠물과 민물이만나는 수역)을 형성하는 것이다. 각종 보와 하굿둑이 이 흐름을 살리지 못하고 차단한다면, 인문학 역시 녹차라테가 되거나 적조가 된다. 심지어 기수역도 없고 습지도 만들지 못하는 죽은 물과 뭍이 되고 말 것이다. 물과 뭍을 스펙터클하게 경계 짓고, 건강한 흐름을 형성하지 않는 그 모든 것들에 의해 인문학은 안락사할 것이다.

맑은 물이 육지를 풍성하게 하고, 건강한 토양이 다시 맑은 물을 형성하는 그곳에, 건강한 습지가 있다. 개구리나 짱뚱어같이 물 안팎에서 사는 나 같은 양서류 인문학자들이 인문학을 오롯이 살아내려면, 물 안팎이 맑고 풍성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습지가 있어야 물과 토양이 건강해지듯, 인문학이 건강해지려면 나 같은 양서류가 서식할 할 수 있는 건강한 습지도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인문학에는 보나, 댐, 둑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원활한 흐름과 이로 인해 생긴 건강한 습지가 필요하다. 인문학의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정녕 <인문학을 위한 람사르협약>같은 것이라도 맺어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누가?

 

 

김동규(철학) 강사
- 부산대학교 사회철학 박사
- 인문학교 섬(閃) 대표(현)
- 노숙인 잡지 <낯선 아침> 편집장

저작권자 © 채널PNU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