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사전에 정식으로 등재되지는 않겠지만, 우리 사회에서 피로의 반대말은 열정임에 분명하다. 피로나 열정은 모두 우리 몸이 감각하는 즉물적인 반응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하지만 열정이 지속적으로 발휘되어야 할 몸의 긍정적인 에너지인데 반해, 피로는 될 수 있는 한 우리 몸에서 제거되어야 할 부정적인 징후로 인식되고 있다.

‘피로회복 · 건강식품 · 자양강장’과 같은 수식어를 동반한 약품들, ‘피로야 가라!’, ‘피로는 간 때문이야’를 외치는 광고카피들은 과로로 지쳐버린 당신에게 오늘도 속삭인다. 당신의 피로는 당장 회복될 수 있다고, 그러니 당신은 피로 따위는 신경 쓰지 말고 열정을 가지고 일하라고.

그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피로는 단순한 감각 경험 이상의 함의를 지닌다. 피로는 제거되어야 할 악(惡)이지만, 그것을 느끼는 것만큼 내가 이 사회에서 남들에게 뒤쳐지지 않으면서 살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되는 것도 없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고 말했던 어느 카드회사의 카피문구가 여전히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내가 느끼는 이 피로가 언젠가 윤택한 삶의 시금석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열정은 피로의 조건이며 피로는 성공을 향한 관문이다. 왜 수많은 신입사원 모집 공고문들이 ‘스펙’만큼이나 ‘열정’을 요구하고 있는가. 열정은 제거 가능한 피로를 딛고, 더 많은 시간을 쪼개서, 더 많은 공간을 누비며, 더 많은 잉여가치를 창출해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도 좋을 만하기 때문이다. 순수한 열정은 순수한 피로와 함께, 그렇게 공공적 소비재의 하나로 소비될 수 있다는 믿음, 공고문이 말하지 않은 더 큰 전제가 거기에 깔려 있다.

보드리야르는 소비사회에 온통 존재하는 것은 기호들뿐이라 했다. 그 말이 맞다면, 나는 한 줄 기호(記號)로 남들에게 드러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들뢰즈는 기호의 차이야말로 존재의 본질이라 했다. 그렇다면 기호로서의 나는 열정의 차이와 우열을 통해 자신을 남과 구분되게 하는 확실한 증명서를 제출해야만 한다. 마치 똑같은 품질과 디자인의 가방이라 하더라도, 브랜드에 따라 명품과 짝퉁이 갈리듯이 우리는 명품 브랜드 매장에 진열되기 위해서 스스로 열정을 더하고 피로를 빼야 한다. 우리가‘ 피로추방사회’ 에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피로추방사회’는 ‘힐링’을 강권할 수 밖에 없다. 소위 ‘멘토’들은 열정이 고갈되고 피로에 찌든 사람들의삶의 면면을 제대로 본 적도 없으면서 그들에게 값싼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네어 스스로의 명성을 높인다. 그 위선의 언어들이 다시금 우리를 ‘피로추방사회’로 내몰도록 한다. 루시앙 골드만은 <소설사회학을 위하여>에서 ‘타락한 사회에서 타락한 방법으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근대소설의 개인이라 했다. 그러나 우리는 ‘타락한 사회에서 진정한 방법으로 타락한 가치’를 좇는다. 순수한 피로와 순수한 열정 사이를 오가는 순수한 우리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이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가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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